‘중기 보호·육성’ 헌법을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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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세상

‘중기 보호·육성’ 헌법을 지켜라

by eKHonomy 2019. 5. 8.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가 인수위도 없이 국정을 시작한 지 2년이 되었다. 공과에 대한 이른 평가도 있지만 아직 제대로 체감하고 확신하기엔 성급하다. 하지만 성패를 떠나 이전 정부와 다른 외형적 변화를 꼽는다면 단연 ‘중소벤처기업부’ 신설이다. 사상 처음으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정책을 주도하는 행정부처가 만들어지고 수장이 국무위원이 된 것은 의미있는 진전이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약 350만개로 전체 기업의 99%, 종사자 수는 82%에 달한다. 중소기업 수는 대만보다 3배, 종사자 비중은 미국의 2배에 가깝다. 그러기에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화려한 중소기업 공약을 내세운다. 하지만 곧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격인 중소기업 정책은 조급한 정부와 이해관계가 상반된 대기업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난다. 정부가 식어가는 경기를 살리겠다고 대기업에 투자와 고용을 늘려달라고 매달릴 즈음이 되면 도돌이표처럼 대기업 중심 경제로 회귀하고 결기에 찼던 중기정책도 흐지부지된다. 이런 악순환은 ‘중소기업 철학’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헌법은 “국가는 중소기업을 보호·육성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중소기업계는 물론 정책을 담당하는 관료조차 낯설거나 선언적 규정으로 가벼이 여긴다. 하지만 헌법이 ‘중소기업’을 언급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대기업처럼 중소기업을 잘 키우라는 경제정책이 아니라 약자일 수밖에 없는 중소기업을 제대로 보호하라는 사회정책으로 이해하는 게 맞다. 장애인·어린이·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국가가 보호하듯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약자인 중소기업에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국민이 정부와 국회에 권능을 부여했음에도 중소기업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다면 헌법 위반이 아닐 수 없다. 경제가 어렵다고, 행정력이나 비용이 많이 든다고 포기하거나 우선순위를 뒤로 돌릴 수 없는 이유이다.


어떻게 중소기업을 보호할 것인가.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임가공이나 납품거래를 한다고 치자. 시장경제에서 우월한 지위의 대기업 ‘갑’과 약자인 중소기업 ‘을’ 간에 원가에 비례해 이익배분이 공정하게 되길 기대하긴 어렵다. 사법심사 대상이 아닌 한 국가가 개입해 교정하는 것도 시장경제의 근본을 흔들기에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파이를 공정하게 나누지 못하는 구조가 방치되면 국민의 혈세를 계속 투입해야 하고 결국 중소기업 생태계는 소멸될 수밖에 없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경쟁하고 거래할 때 시장원리나 사적 자치만 고수하면 장애인이나 노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과 같다. 법률과 행정으로 장애인과 노약자의 공정한 기회와 대우를 보장하는 것처럼 중소기업도 제대로 보호받을 수 있도록 법률과 행정 시스템이 구축돼야 공평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진다.


문재인 정부가 핵심 경제정책인 소득주도성장에 필요한 가계소득을 높이려 이론적 토대인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하청구조 개선에 먼저 나서지 못한 채 최저임금 인상 등 대증요법에만 매달린 것은 아쉽다. 제대로 된 소득주도성장을 원했다면 먼저 헌법상 중소기업의 보호·육성 의무를 앞세웠어야 했다. 다양한 정책과 입법도 가능하지만,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거래에 거래조건 등에 관한 ‘중소기업 거래보고제’만 도입해도 갑을관계에서 공정성이 담보돼 최저임금 여력도 확보하고 부작용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가 중소기업에 대한 헌법적 의무를 다하는 일은 심각한 사회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도 긴요하다. 가계부문의 양극화 해소에는 사실상 세금정책만 가능하다. 하지만 기업부문에선 적극적인 중소기업 정책만으로도 시장구조의 교정이 가능하다. 헌법이 경제민주화를 선언한 이상 시장기구가 정의로운 방향성을 갖도록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워줘야 한다. 하루하루가 팍팍한 중소기업인들이지만, 우선 몇 푼의 지원보다 명예와 보람으로 기업가 정신을 되찾고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만드는 새로운 관점과 혁신적 정책이 필요하다. 결코 가볍지 않은 중소기업인의 사회적 역할을 인정해 공무원이나 교원들처럼 정부포상제를 도입하고 상징적으로라도 성실납세와 고용창출에 따른 연금 혜택을 주는 방안도 바람직하다.


시장경제를 담보로 중소기업을 희생하고 폐해를 혈세로 메우는 ‘갑질 꽃놀이패’ 시장을 그냥둔 채 사후약방문만 거듭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면 나라다운 나라도, 대만·일본·덴마크 같은 ‘중소기업 천국’도 요원하다. 마침 재벌개혁을 주창하던 박영선 의원이 중소벤처기업부의 새 수장이 되었다. 헌법정신에 맞게 국가의 의무를 다하도록 중소기업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꿀 호기다.


<구재이 | 한국납세자권리연구소장·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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