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나만 잘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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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조의 경제시평

“너랑 나만 잘하면 돼”

by eKHonomy 2015. 8. 11.

10년도 더 된 일인 것 같다. TV 채널을 돌리다가 도올 김용옥 선생이 기자와 대담하는 걸 보게 되었는데, 솔직히 대담 주제가 뭐였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하여튼, 주거니 받거니 신나게 이야기를 풀어가다가, 마지막에 기자가 “그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은 뭡니까?”라고 묻자, 도올 선생이 “너(언론)랑 나(지식인)만 잘하면 돼!”라고 답했다. 무릎을 탁 쳤다. 정말로 우문에 현답이다.

시민단체 책임자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언론 접촉이다. 당연히 경제 관련 기사나 칼럼은 꼼꼼히 챙겨 본다. 하지만 새로운 정보나 시각을 얻기보다는 ‘이렇게밖에 못 쓰나’라고 개탄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기사를 쓴 기자도 그렇지만, 거기에 코멘트를 달거나 기명칼럼을 쓴 유수의 지식인들에 대해 특히 그렇다. 최근의 삼성-엘리엇 사태와 롯데 사태를 지켜보면서는 ‘언론과 지식인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저 꼴이지’라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내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는 건 아니다. 나는 가치판단을 하기 이전에 비용과 편익을 비교형량하도록 훈련받은 경제학자다. 나이 들면서 ‘가치 상대주의’ 성향이 더 강해졌고, 요즘은 ‘보수에 대한 비판’ 이상으로 ‘진보의 금기에 대한 도전’에 집중하고 있다. 따라서 내 생각과 다르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국 사회에서는 내가 ‘소수 중의 소수’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한국의 언론과 지식인에 대해 평정심을 잃은 것은, 기초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논리의 일관성을 점검하는 ‘깐깐함’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최소 요건마저 갖추지 못했다면, 그건 언론도 아니고 지식인도 아니다.

예컨대, 엘리엇의 존재가 드러나자 모든 언론은 ‘죽은 동물을 먹이로 삼는 대머리독수리’라는 뜻의 벌처(vulture)펀드로 매도하기 시작했다. 독자들만이 아니라, 그 기사나 칼럼을 쓴 기자·지식인들도 대부분은 헤지펀드를 그런 뜻으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판단의 전제가 된 정보는 어디서 구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란다. 아마도 또   다른 언론이었을 게다.


삼성과 엘리엇 공방 일지_경향DB


구글에서 ‘hedge fund activism’(헤지펀드 행동주의)을 검색해보기만 했더라도, 한국의 자칭타칭 자유주의자들도 자기 주장의 논거로 자주 인용하는 세계적인 학자들이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관련한 헤지펀드의 긍정적 기여에 대해 이미 많은 논문을 제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물론 엘리엇은 돈을 벌기 위해 삼성을 공격했고, 헤지펀드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많다. 그러나 한쪽 눈을 감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은 지적 게으름 내지 곡학아세의 별칭일 뿐이다. ‘애국했다 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한편, 롯데 총수일가의 경영권 분쟁이 시작되면서 언론과 지식인들은 한국롯데가 일본롯데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에 당혹했고, 더구나 일본롯데의 주주구성에 대해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곧바로 롯데의 국적감별 논란이 일더니, 공정거래법을 고쳐서라도 일본롯데의 비밀장막을 벗기라고 닦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역시 우리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편협함을 드러낸 사례에 불과하다. 법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비상장회사는 주주구성은 물론 재무제표도 공시할 의무가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미국도 유럽도 그렇다. 다만, 대출을 받거나 증권을 발행하는 등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려면 법에서 정한 것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그것이 시장의 역할이다. 우리나라는 법적 의무는 세계에서 가장 강하지만, 시장의 압력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공정거래법을 일본에 적용하는 방식으로만 문제를 풀려고 했다. 우물 안 개구리다.

“한국에 투자할 기업이 없다.” 네덜란드연기금(APG)의 한 임원이 전달한 홍콩·싱가포르의 최근 분위기다. 현대차·삼성·롯데 등 이른바 주인 있는 기업도, KB금융·포스코·대우조선해양 등 이른바 주인 없는 기업도 하나같이 부진한 실적과 시대착오적인 지배구조 문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체 상장주식의 외국인 지분율이 2010년 남유럽 재정위기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다. 한국 기업에 대한 신뢰가 붕괴되었다는 뜻이고, 한국시장에서의 엑소더스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물론 기업이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언론과 지식인이 애국심과 국적감별만 들먹이는 시장 환경에서 기업이 바뀌겠는가. 바뀐다 한들 올바르게 바뀌겠는가. 기업인과 정치인을 탓하기 전에 너(언론)와 나(지식인)부터 잘해야 한다. 보수도 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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