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업상속공제’ 개편 논의가 정점을 향하고 있다. 최근 경제난 속 구원투수로 정치적·경제적 이슈로 급부상한 것은 여당이 ‘가업상속 및 자본시장 과세체계 개선 태스크포스(TF)’를 만들며 적극 나서면서부터다. 여당은 좀체 살아나지 않는 경제를 풀 세제 부문 열쇠로 증권거래세 인하와 함께 가업승계 세제개편을 타깃으로 잡았다. 지난 정부 동안 상속세 완화를 필사적으로 저지했고 늦춰진 복지와 사회문제 등 산적한 과제를 안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의아한 일이다.
가업상속 과세체계 개편논의는 경제살리기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재계의 주장만 있을 뿐 실제 가능한지 아무도 묻지도, 답하지도 않는다. 과연 가업상속공제를 확대해 상속세를 줄여주면 경제를 살릴 수 있을까. 대답을 위해선 우선 상속세와 가업상속공제의 ‘정체성’을 확인해야 한다.
상속세는 법인세 같은 ‘기업’세금이 아니라 양도세 같은 ‘개인’의 세금이다. 상속세가 줄어들어도 투자나 고용을 창출해 경제를 활성화할 ‘기업소득’은 늘지 않는다. 자산가가 500억원의 주식을 자식에게 상속하고 250억원의 상속세를 면제받았다고 법인기업이 투자에 나서는 건 아니다. 설사 기업의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기업주의 세금을 줄여야 경제활성화 효과가 있다고 해도 이는 지난 정부에서 경제활성화하겠다고 ‘낙수효과’를 기대하며 자산가들에게 조세혜택을 몰아줘 부를 늘려준 ‘부자감세’ 정책과 다를 바 없다.
가업상속공제만 놓고 보자. ‘가업’요건에 해당하는 상장기업을 포함해 매출 3000억원 규모의 법인 주식을 자녀에게 상속하면 최대 500억원까지 과세를 제외시켜주는 제도다. 부동산 등 상속재산리스트에서 주식만 특별취급하는 것은 기업과 개인이 일치된 ‘가족기업’의 주식 상속세로 기업이 문 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런 제도가 모든 기업 지원을 위한 정책인 양 치부되고 있다. 그럼 가업상속공제는 상증법이 아니라 조특법에 놓여야 맞다.
지금 재계와 일부 정치인은 침체된 경제를 살리고 백년기업을 위해서라도 대상기업의 규모를 매출 1조원, 공제금액을 1000억원까지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여정부 때까지 수십년간 1억원에 불과했던 가업상속공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대상기업과 공제액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상장기업을 포함해 외감을 받는 기업의 97%가 대상이 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주식을 포함해 상속재산 총액이 500억원을 넘는 상속자가 연간 10여명에 불과한 상황에서 가업상속공제액은 최근 크게 늘어 1인당 평균 50억원씩 3000억원을 돌파했다. 더구나 후진적 유산세체계 덕분에 가업과 무관한 상속인도 혜택을 받는다.
가업상속공제 인원이 연 100여명도 안되니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고도 한다. 독일에 비해 적용대상이 적은 것은 우리나라 상속세 납부인원이 전체의 2% 남짓에 불과하고 상속재산은 부동산인 경우가 많으며 주식상속도 다른 공제액이 크고 후계자 부재로 대상이 아닌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선진국과의 GDP 차이를 조정하지 않아도 우리나라의 가업상속공제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가업승계의 모델국가로 불리는 독일도 헌재가 과도한 가업상속공제에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미국은 아예 공제제도조차 없다. 지금 과도한 공제규모를 손봐야 하는 상황에서 외려 추가확대 주장은 경제활성화를 명분으로 매출 3000억원도 넘는 상장기업의 대주주 등 대자본가에까지 특혜를 추가하려는 탐욕에 지나지 않는다.
비상한 경제상황에 정부와 여당이 적극 나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는 것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경제살리기와 무관한 가업상속공제 등 상속세인하 논쟁에 매몰되면서 헛힘만 쓰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 가업상속공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사후관리 기간과 요건을 완화하는 정도라면 정부의 세법개정안에 맡겨도 충분하다. 그럴 시간에 정부와 여당은 신음하면서 죽어가는 자영업자나 중소기업을 살리는 조세 분야 ‘심폐소생술’에 매진하는 것이 맞다.
한 정부의 조세와 부동산정책은 그 정부의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성패를 좌우한다. 문재인 정부는 자산소득에 대한 과세형평을 제고하는 ‘소득재분배’ 세제를 약속했다. 그럼에도 자산소득의 상징인 상속세 과세가 무력화되면 포용적 성장을 위해 상속과세를 강화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권고에도 배치되고 문재인 정부가 심혈을 기울이는 소득주도성장 정책도 치명타를 입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땀 흘려 번 소득도 아닌 ‘금수저’ 세금감면에 먼저 나선다면 촛불혁명을 통해 이전의 정권과 다른 정부를 선택한 국민의 절망이 두렵다.
<구재이 | 한국납세자권리연구소장·세무사>
'경제와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거시경제학 지각변동과 재정정책 (0) | 2019.06.26 |
---|---|
보호무역의 암초는 관세만이 아니다 (0) | 2019.06.19 |
경제개혁을 위해서도 경기부양 필요 (0) | 2019.05.29 |
빅데이터 시대의 국가통계 (0) | 2019.05.22 |
‘중기 보호·육성’ 헌법을 지켜라 (0) | 2019.05.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