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에 이르는 드라마는 항상 감동을 준다. 인류의 진보에 지대한 기여를 했던 많은 위인들의 인생 속에서 이런 드라마를 자주 발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역경을 극복했던 귀중한 경험이 바로 그들이 이룩한 성취의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역경을 극복한 경험은 발전을 이끄는 귀중한 인적자본이다.
미국의 공익미디어 WGBH의 2018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86%에 이르는 대다수가 대학 입학생의 인종·민족 다양성을 대학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목표라고 인식했고, 미국인 58%가 사회경제적 혹은 건강상 역경을 대학 입학결정에서 고려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역경을 입학결정에서 반영하게 되면 입학생들의 다양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고 입학기회는 소수자들을 포함하여 열악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에게 더 평등하게 보장될 것이다.
같은 입학시험 성적을 획득한 두 학생이 있다. 한 학생은 곤란한 가정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리고 다른 학생은 유복한 가정의 정서적·물질적 지원과 쾌적한 환경 속에서 얻은 성과라고 하자.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어느 학생이 더 높은 잠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판단하겠는가? 당연히 역경을 극복한 학생일 것이다. 성적이 조금 낮은 학생이라 하더라도 어려운 역경을 극복한 경우에는 더 높은 성적을 획득한 학생과 동일하게 평가될 수 있다. 이렇게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을 대학입학생 심사에 도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미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SAT) 주관기관이 얼마 전 발표했고 지금 미국 사회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역경을 존중했고 가난을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좋은 전통을 갖고 있었고 역경을 극복한 사람들의 경험이 동력이 되어 국가발전을 이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역경이 실패와 좌절로 버려지는 그런 사회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화분에 심은 고운 화초처럼 좋은 환경 속에서 잘 길들여지고 잘 치장된 사람들이 명문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승진하고 영전하며 승승장구하는 그런 사회. 불우한 환경과 열악한 여건을 극복한 귀중한 경험이 버려지는 사회. 이런 기회불평등한 사회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통찰력이 조금만 있다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세계 각국의 자료를 분석한 경제학계 논문들은 이런 통찰이 사실임을 확인해준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 2005년 자료를 분석한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부친 학력이 전문대졸 이상인 학생들과 중졸 이하인 학생들 간에 자기주도 학습 시간의 중위 값 격차가 크게는 두 배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이 두 집단의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율 격차도 두 배에 가까웠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을수록 가족으로부터의 심적, 물적 지원이 부족하고 학업 환경이 열악하여 스스로 학습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대학 입학을 포기할 확률도 높다는 것이다. 이런 격차는 수능 성적의 기회불평등도로 나타난다. 가구환경이 가장 열악한 학생들이 능력은 있어도 기회불평등 때문에 고득점 획득에 실패할 확률을 나타내는 개천용불평등도가 국어와 영어에서 각각 약 50%와 70%로 높게 나타났다.
이처럼 높은 계층 간 교육격차는 당연히 경제활동에서의 소득기회불평등으로 이어진다. 가구주의 출신 배경(부친의 직업 혹은 학력)이 열악할수록 높은 가구소득을 획득할 기회는 줄어든다. 2000년대 초반 이후 최근까지 노동패널자료를 이용한 연구들에서 소득기회불평등도가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분석 대상을 가구주 본인의 학력이 전문대졸 이상인 가구로 제한하면 소득기회불평등도가 절반 가까이 큰 폭으로 하락한다. 그만큼 교육과 입시제도가 소득기회불평등을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는 성별 소득기회불평등은 더 심각하다. 2016년과 2017년 자료에서 능력이 있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최상위 노동소득획득에 실패할 확률(개천용불평등도)이 66%에 달했다. 전문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여성들에게서도 큰 차이가 없게 분석되어 성별 소득기회불평등은 교육을 통해서도 극복되기 어렵고, 여성이 결혼, 출산, 그리고 양육으로 겪는 차별과 경력 단절을 근절하는 제도적 방안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열악한 환경 때문에 부딪혀야만 하는 역경을 높은 의지력과 노력으로 극복한 사람들이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역경 극복의 귀중한 경험이 사회발전을 위해 활용될 수 있다.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분배정의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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