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유수 기관들의 경제분석 보고서가 홍수를 이룬다. 그 수많은 한국 경제 관련 보고서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위험요소가 가계부채·정부부채 문제다. 중산층까지를 포함하는 가계부문의 원리금 상환 부담이 내수를 위축시켜 일본식 장기불황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고령화 사회 및 한반도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선 장기적 재정건전성 확보의 중요성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런 이야기는 이제 상식에 속한다.
이게 다인가? 내 의견은 다르다. ‘단기적으로’ 한국 경제를 위협하는 최대 위험요소는 가계부채도 정부부채도 아닌 기업부채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친 결과 한국 기업의 부채비율은 그 어떤 나라의 기업들보다 건전해지지 않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특히 ‘대기업들은 현금을 쌓아두고도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는 판이니, 내 판단에 어리둥절해하는 분도 많을 것이다.
오리온의 지원불가 결정에 동양그룹 '사면초가' (출처 :연합뉴스)
그런데, 간단치가 않다. 두 가지의 통계적 함정 때문에 기업부채 문제의 심각성이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첫째, 평균 수치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평균 부채비율이 안정되어 있다는 것이 곧 모든 기업의 재무구조가 건전하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국민경제의 안정성 여부를 판단할 때는 ‘평균’보다는 ‘한계’를 봐야 한다. 최근 발표된 한국은행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이자보상배율이 100% 미만, 즉 영업이익으로 원금은커녕 이자도 못 갚는 경우가 대기업은 29.1%, 중소기업은 43.7%나 된다. 한계상황에 몰린 부실(징후)기업 비중이 이미 임계치를 넘었다.
둘째, 그룹의 상황을 판단할 때는 계열사들의 재무제표를 단순 합산한 자료를 사용해서는 안된다. 계열사들 간의 내부거래로 인해 재무건전성이 실제보다 과대평가되기 때문이다. 계열사 출자를 제거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재무지표를 재계산한 경제개혁연구소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총 46개 그룹 중에서 2012년 말 연결기준 부채비율이 200%를 넘는 그룹이 20개고, 그 중 9개는 300%를 초과했다. 이 숫자는 웅진·STX·동양 등 이미 부도난 그룹들은 제외한 것임을 주의하기 바란다. 즉 작년 말 기준으로 전체 재벌의 절반 가까이에서 재무적 이상 신호가 보였고, 그 중 열악한 상황의 그룹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금융감독원장이 국정감사장에서 숫자를 딱 찍어 언급하는 바람에 파장을 일으킨 4개 그룹(현대, 한진, 두산, 동부)은 연결기준 부채비율이 300%를 초과했고, 연결기준 이자보상비율도 100%에 미달했다. 개개 그룹의 사정을 좀 더 세밀히 분석해야겠지만, 이 정도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넘어갈 단계는 이미 지났다. 이 외에도 형편이 만만찮은 그룹이 적지 않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딱 한 가지만 지적하겠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 실패다. 2008년 위기로 세계경제가 망가졌는데, 어찌 한국 경제만 무사할 수 있겠는가. 건설업·조선업·해운업을 필두로 부실기업이 속출했고, 중소·중견기업 차원을 넘어 대기업(집단)으로까지 확산되었다. 그런데도 문제를 드러내고 치유하기보다는 덮고 쉬쉬하기에 바빴다. 주채권은행 주도로 기업들의 재무위험을 상시 평가해서 부실기업 구조조정에 착수했다고는 하나, 그 숫자도 턱없이 모자랐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도 대부분 중소기업에 국한되었고 대기업(집단)은 손도 대지 못했다. 대한전선그룹처럼 주채무계열 제도에 따른 재무개선약정을 맺고도 회생에 실패한 그룹도 있고, 동양그룹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다가 피해자를 양산하면서 무너진 그룹도 있다. 관료들의 정보 왜곡과 집권세력의 무사안일 속에 구조조정의 타이밍을 놓쳐 국민경제에 골병이 든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차적 과제는 구조조정 관련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다. 통합도산법·기업구조조정촉진법 등 법제화된 절차는 물론 법적 근거도 없이 채권단 자율협정 형식으로 진행되는 주채무계열 제도 등에 내재된 문제점들을 하루빨리 개선해야 한다. 그 기본 내용은 지난번 칼럼(‘차제에 외양간이라도 확실히 고치자’)에서도 언급했으니, 오늘은 구조조정 문제에 임하는 정부 정책 기조에 경고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2008년 위기를 예언해서 세계적 스타가 된 미국의 루비니 교수는 “파산 없는 자본주의는 지옥 없는 기독교와 같다”고 단언했다. 부실은 은폐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위기를 초래할 뿐이다. 더 이상 구조조정을 늦추어서는 안된다. 특히 경제민주화 입법의 철회를 미끼로 재벌의 투자를 구걸하는 식의 단기 경제활성화 대책으로 문제를 미봉하려는 헛된 미련은 버려야 한다. 천수답 농사도 아닌데, 국민의 운명을 운에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구조조정의 고통을 분담하고 그 성과를 공유하는 제도와 관행을 만드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부실을 걷어내야 경제가 산다. 그게 시장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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