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금융위원회는 되는 일이 없다. 특히 신제윤 위원장 취임 이후 의욕적으로 추진한 4개 현안(금융사 지배구조, 금융감독체계, 우리금융 민영화, 정책금융체계) 관련 태스크포스의 보고서들은 발표되는 족족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정기국회가 열리면 여야 불문하고 금융위를 난타할 분위기다. 천하의 금융위가 어쩌다 동네북 신세가 되었는지…. 최근 발표된 정책금융체계 개편 방안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산업은행과 정책금융공사를 다시 합친다는 것이다. 2009년 4월 이명박 정부는 구 산업은행을 둘로 쪼개어, 중소기업 지원 등의 정책금융 업무는 신설된 정책금융공사로 하여금 전담케 하고, 나머지 기업금융·투자은행 업무는 현재의 산업은행이 특화해 장차 민영화하는 방안을 시행했다. 여기까지는 그럴싸하다.
고승범 금융위원회 사무처장이 산업은행과 정책금융공사 통합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출처 :경향DB)
문제는 경제환경의 변화다. 구 산업은행 개편 직전인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래 세계 경제는 전대미문의 위기 상황에 직면했고, 그 이후로도 유럽의 재정위기, 최근 미국의 출구전략 시행 여부 등에 따른 불확실성이 지속되고 있다. 그 결과 이명박 정부의 산업은행 개편 방안은 애초의 취지를 살리지 못할 형편이 되었으니, 4년여 만에 없던 일로 하자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계 경제의 위기 속에 국내적으로는 건설업·조선업·해운업 등 부실업종과 금호그룹·STX그룹 등 대형 부실기업이 속출했고, 그 구조조정 과정에 산업은행이 ‘관치의 늘어진 팔’로 개입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결국 민영화한다던 산업은행은 살 사람이 없다는 문제는 둘째치고 점점 더 팔 수 없는 물건이 되어 갔다. 반면, 법에 규정된 고유업무를 수행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정책금융공사는 존립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여타 정책금융기관의 업무를 기웃거리는 천덕꾸러기가 되었고, 정책금융의 중복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 한마디로, 법과 현실이 괴리된 전향적인 사례다.
이제부터는 판단의 문제다. 환경 변화를 감안할 때 이명박 정부의 산업은행 개편 방안은 ‘태어나서는 안될 아이’였다고 판단한다면, 이제라도 원위치하는 것이 국민경제적 비용을 줄이는 길이다. 반대로, ‘애지중지 키워 가야 할 옥동자’로 판단한다면, 현실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산업은행을 조속히 민영화하고 정책금융공사의 능력을 배양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산업은행 민영화 추진 주요 인사(출처 : 경향DB)
어느 판단이 옳은가. 물론 정답은 없다. 다만 건설적 토론을 위해서는 판단의 전제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관건은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가 언제 회복될지, 그 과도기 동안 발생할 부실기업의 구조조정 및 금융시장의 불안정성 문제에 관치금융 이외의 수단으로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지에 대한 판단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가까운 시일 내에 그 전제조건을 갖출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본다. 즉 세계 경제의 부침 속에 한국 경제도 흔들리는 불안정한 시기가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고, 대형 부실기업을 투명하게 구조조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 조만간 구축될 것 같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산업은행과 정책금융공사의 재통합에 찬성한다. 그것이 최선이라서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금융위의 안을 모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금융위 안의 최대 맹점은 부실기업 구조조정 및 금융시장 안전판 기능을 정책금융이라고 강변하는 데 있다. 해괴망측한 논리다. 내가 20년 동안 경제학 교수로 살았지만, 이걸 국책은행이 담당해야 할 정책금융 기능이라고 설명한 문헌은 본 적이 없다. 산업은행에 부실기업 구조조정 기능을 인정하는 것은 내가 하지 말라고 해도 계속 할 것이 틀림없고, 이왕 할 거라면 명실상부하게 책임을 부여하고 감독하는 것이 지금의 관치금융보다는 폐해가 적을 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산업은행이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공적자금, 즉 금융안정기금까지 관장하는 건 인정할 수 없다. 투명성을 보장할 수 없고, 국민 세금인 공적자금의 낭비를 초래하고 오히려 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다. 따라서 금융안정기금은 예금보험공사로 이관할 것을 주장한다.
이번 정책금융체계 개편안은 협의의 정책금융 이외의 문제가 본질을 흐리고 있다. 산업은행·정책금융공사 재통합 문제도 그렇지만, 부산지역 여당 의원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선박금융공사 신설 공약 폐기 문제도 마찬가지다. 부실 조선사와 해운사를 구제하는 것이 무슨 정책금융인가. 또한 대외 정책금융을 현재의 수출입은행과 무역보험공사 이원 체제로 그냥 가기로 한 것도 정책금융 자체의 논리보다는 이들의 자본 확충에 필요한 재정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다는 속사정에 기인한 것이다. 한편 복잡하게 얽혀 있는 중소기업 정책금융기관들을 그대로 놔두기로 한 것은 창조경제의 선봉에서 빠질 수 없다는 업무영역 다툼의 결과일 뿐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정책금융체계 개편이 제대로 되겠는가.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다.
김상조 |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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