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4일 정부는,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증자를 위해 ‘국책은행 자본확충협의체’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두 달 반이 흐른 지난 7월18일 여·야·정은 추경안에 수출입은행 1조원 증자 방안을 포함시키고, 자본확충펀드 운용은 최소화한다는 합의안을 발표했다. 이로써 자본확충펀드는 사실상 물 건너가고, 국책은행 증자는 정부가 직접 돈을 투입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필자는 이 합의안이 정답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난 두 달 반 동안 우리가 목도했던 정책혼선은 관치금융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것을 차근차근 돌아보고, 재발방지 대책을 생각해 보자.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14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첫 번째 문제는 거짓말이다. 정부가 처음부터 선호했던 방식은 한국은행(한은)이 직접 국책은행에 출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슬금슬금 흘린 논거는 정부가 돈을 얻으려면 추경을 해야 하는데, 추경에는 시간이 걸리고, 국책은행 증자용 추경은 추경 사유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7월18일의 여·야·정 합의는 이런 주장이 거짓말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추경을 통해 1조원 만들어서 수출입은행 증자에 투입하기로 했으니 말이다. 요새 표현으로 “참, 어이가 없다.”
두 번째 문제는 한은의 궁색함이다. 4월 말, 국책은행 자본확충에 한은 발권력을 동원한다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 한국은행은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국책은행 자본확충은 정부 몫이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멋있었다. 이렇게 한판 화끈하게(?) 붙고 잘라 버렸으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사태는 5월4일 이주열 한은 총재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던 아세안+3국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 중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뜬금없이 ‘자본확충펀드’ 방식을 제시하면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 방안을 덥석 물었고, 한은 실무진은 어쩔 수 없이 총재 말을 합리화하기 위한 “언어의 서커스”를 시작하게 된다. 그 최고봉이 7월20일에 공개된 임시 금통위 의사록이다. “금융안정 책무를 보유한 한국은행이 국책은행의 자본부족으로 인한 금융시장 불안 가능성에 대비하는 비상계획, 즉 컨틴전시 플랜 차원에서 보완적·한시적 역할을 담당하여 지원한다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이것도 “어이가 없는” 말장난이다.
우선 지금 금융시장 불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앞으로 언제 있을지도 모르는 금융불안정에 대비해 비상계획을 마련하겠다면서 통상적인 일정에도 없는 금통위 임시회의를 소집해서 의결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기준금리를 동결한 7월14일의 정례 금통위까지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비상계획의 발표가 시급했단 말인가.
그다음으로 이것이 국책은행 증자지원 그 자체가 아니라, 증자가 되지 않을 경우 파생될 수도 있는 “금융시장 불안정”을 막기 위한 비상계획이라면 왜 다른 은행을 제쳐두고 꼭 기업은행만을 지원 대상으로 해야 하는가? 한국은행이 브렉시트에 따른 금융시장 불안정을 막기 위해 선제적으로 3조원을 공급했던 지난 6월 말에는 왜 기업은행을 마다하고 전체 금융시장을 상대로 유동성을 공급했단 말인가? 삼척동자도 간파할 뻔한 궁색함일 뿐이다.
그러나 지난 두 달 반의 갈팡질팡은 정부의 거짓말과 한은의 궁색함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야기했다. 그것은 구조조정을 위한 진정한 골든타임을 허송했다는 것이다. 5월에 정부가 국책은행 증자 운운하면서 구조조정의 관점을 흐리지 않고 바로 구조조정에 돌입했다면 두 달 반의 시간은 앞당길 수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5조원에 달하는 대우조선해양의 분식회계 의혹이 드러나고, 대우조선해양의 부실 현황이 드러나던 작년 10월 부근에 구조조정을 시작했다면 적어도 반년의 시간을 앞당길 수 있었다.
이제 모처럼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모습이 되었으니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개선을 생각해 보자. 가장 시급한 것은 관치금융의 온상인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을 폐지하는 것이다. 모피아의 주도에 의한 구조조정은 신속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정치권과 모피아가 부실기업을 낙하산 자리로 이용하는 도구가 될 뿐이다. 그다음으로는 한국은행법을 개정해서 한은이 남용하고 있는 금융안정의 개념을 명확히 하고, 금융안정과 관련한 한은의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내용은 금융감독체계 개편의 큰 그림과 무관할 수 없다. 다행히 그 큰 그림은 이미 상당 부분 나와 있다. 이제는 국회가 구슬들을 잘 꿰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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