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경제민주화가 기업 투자와 맞바꿀 흥정 대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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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경제칼럼

[사설]경제민주화가 기업 투자와 맞바꿀 흥정 대상인가

by eKHonomy 2013. 8. 29.

박근혜 대통령은 어제 10대 기업 총수들과 간담회를 갖고 경제활성화를 위한 과감한 투자를 주문했다. 박 대통령은 대신 “경제민주화가 대기업 옥죄기나 과도한 규제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겠다”며 현재 추진 중인 상법 개정안도 재검토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재계도 연초 계획보다 투자·신규 채용 규모를 늘리겠다고 화답했다. 정·재계가 경제민주화 속도 조절과 투자 확대를 맞바꾼 꼴이다. 지난 대선 과정에 국민적 합의를 이룬 경제민주화가 정치적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정작 경제를 살리겠다면 대기업의 불공정거래 관행을 바꿔 중소·벤처기업의 활로를 찾아주는 게 더 시급한 과제다.


박 대통령은 “경제활성화를 위한 최우선 과제가 투자 확대”라며 “경제민주화 입법 과정에 많은 고심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경제민주화 속도 조절을 통해 투자를 유도하겠다는 뜻이다. 경제운용의 초점을 경제활성화에 둔 이상 투자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렵다고 본 것이다. 경제민주화 입법 저지에 총력전을 펴고 있는 재계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연간 투자·고용 계획이 차질없이 이행될 수 있도록 기업의 의견에 귀 기울여 달라”고 했다. 듣기에 따라 재계가 협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박찬호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가 22일 서울 여의도 KT빌딩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상법 개정안에 대한 재계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_ 연합뉴스


경제민주화를 희생한다고 투자가 늘어날까. 재계는 올 초 148조원의 투자를 약속했지만 상반기 투자는 당초 계획의 41.5%에 그쳤다. 지난해보다 오히려 10% 이상 줄었다. 지난해 말 10대 그룹의 현금성 자산은 124조원으로 최대 규모다.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는데다 마땅한 신규 투자처가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닦달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상법 개정안 재검토는 한달여 만에 정부 방침을 뒤집는 격이다. 개정안은 소액주주의 권한을 확대하는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 선출이 골자다. 새누리당 이혜훈 최고위원도 “경제권력의 전횡을 방지하고 투명한 경영 관행을 확립하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이 비교적 잘 반영된 고육지책”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당정은 개정안의 수위 조절이나 시행시기 유예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재계를 달래자고 재벌총수의 황제경영마저 묵인하겠다는 뜻인지 묻고 싶다.


박찬호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가 22일 서울 여의도 KT빌딩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상법 개정안에 대한 재계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_ 연합뉴스


경제가 활력을 찾으려면 기업 투자가 필요한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 재계와 엉뚱한 거래를 할 게 아니라 해외에 집중된 투자를 국내로 끌어들이는 유인책을 마련해야 한다. 고용 없는 성장에 시달려온 미국·일본이 해외공장을 끌어들여 제2의 제조업 신화를 쓰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경제민주화는 피할 수 없는 세계적 추세다. 속도 조절론으로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 갑을관계 병폐나 일감 몰아주기 관행을 방치한 채 수출 대기업에 목을 매는 한 제대로 된 경제살리기 대책은 기대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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