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는 현 정부에서 위상이 높아진 대표적 정부 부처다. 공정경제가 문재인 정부의 3대 경제정책 방향 중 하나이고 재벌개혁에 헌신해 온 김상조 공정위원장의 ‘스타성’이 얹어진 결과일 것이다. 재벌개혁은 디테일에 능한 공정위 관료들의 협조 없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최근 ‘이런 공정위가 과연…’이란 생각을 갖게 만드는 소식들을 적잖이 접하고 있다.
2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공정거래위원장과 5대 그룹 전문경영인과 간담회에 참석한 하현회 LG 사장,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이상훈 삼성전자 사장, 김상조 위원장, 정진행 현대자동차 사장, 황각규 롯데 지주 사장, 이동근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이(왼쪽부터) 기념사진을 찍기 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공정위 고위직을 맡으려면 퇴직 후 로펌이나 대기업에 재취업하지 않겠다는 서약서 제출제도라도 만들어졌으면 속이 시원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현재 공정위 상임위원 3명은 모두 민간근무휴직제를 통해 로펌·대기업에서 일한 경력을 갖고 있다. 공정위 상임위원은 정부 1급 자리로는 드물게 임기(3년)가 사실상 보장되는 자리다. 비상임위원 4명과 함께 공정위 최고 의사결정 합의체인 전원회의를 구성하는 멤버로 역할이 막중하다. 이런 자리에 로펌·대기업 근무 경력자들이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미덥지 않은데 일부 위원은 별 제약 없이 자신이 일했던 로펌과 관련된 사건 심의에 관여했다고 하니 씁쓸하다.
다른 사례는 충격적이다. 공정위에서 5년간 일하다 김앤장법률사무소로 옮긴 한 변호사는 시멘트 업체 성신양회의 담합 사건을 변호하며 과징금 437억원 중 절반을 깎았다. 로펌 입장에선 큰 공을 세운 셈인데 성신양회의 적자를 이유로 과징금 감경을 신청했고 적자는 공정위 과징금을 비용으로 미리 반영한 가공의 결과였음이 드러났다. 공정위는 이런 사실을 파악하고도 무기력했다. 문제의 변호사에게 공정위 출입금지조차 내리지 못했다고 하니 김앤장 눈치를 본 것 아니냐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2016년 1월부터 현재까지 민간근무휴직제를 이용해 대기업에 근무한 공정위 4급 공무원은 모두 5명이었다. 재벌 횡포에 시달리는 중소기업의 실상을 알아보고, 그들을 도울 제도적 방안은 무엇인지 탐구하려 중소기업을 선택한 사례는 없었다. 박근혜 정부에서 공정위원장을 맡았던 인사는 세계 최대 통신 반도체 기업 퀄컴의 소송 대리를 맡은 로펌에 고문으로 지난 3월 합류했다고 한다. 공정위는 지난해 퀄컴에 1조30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고, 퀄컴은 소송을 제기했으니 그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로펌들이 공정위 출신들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들의 공직 시절 네트워크를 활용하기 위해서다. 공정위가 법적 분쟁에서 패소한 72%가 대형 로펌에 집중돼 있다는 통계는 공정위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전관들의 존재와 무관치 않다. 공정위 출신들은 경제민주화가 이슈로 부각되면서 로펌이나 재벌의 집중적 영입 대상이 되고 있다. 로펌에 근무하는 공정위 출신들로 공정위를 구성하고도 남을 것이란 말은 결코 허튼소리가 아니다. 공정위 전·현직 공무원을 마피아에 빗댄 ‘공피아’는 이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 됐다.
한국에서 각종 개혁이 실패하는 이유로 관료집단의 저항이 많이 거론된다. 공정위 관료들도 영속 권력인 로펌이나 재벌과 잘 지내는 게 퇴직 후 재취업에 유리하다는 걸 모를 리 없다. 결국 재벌개혁을 하려는 공정위가 관료개혁을 통해 청렴성과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는 작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서로 끌어주고 당겨주는 공피아들의 끈끈한 연대감을 해체하는 것이야말로 재벌개혁의 성공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김상조 위원장은 “공정위 업무 추진의 원동력은 국민의 신뢰에서 나온다. 우리의 자그마한 흠결 하나만으로도 사건 처리의 공정성을 의심받고 조직 전체의 신뢰를 잃게 만든다”고 말했지만 앞으로 사정이 별로 달라질 것 같진 않다. 지난달 공정위가 전관예우 근절 등 투명성 확보 대책을 내놨지만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부정청탁이 외부에서 이뤄지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결국 공정위 현직 관료나 퇴직자들의 양심을 믿어보는 방법밖에 없다.
잊혀질 만하면 터져나오는 김 위원장의 설화도 문제지만 공피아 문제는 공정위 신뢰를 갉아먹는 구조적이고 뿌리 깊은 병폐다. 이대로 가면 시간은 결국 ‘우리 없이 일할 수 있겠나’라고 생각하는 공정위 관료들의 편이 될 것이다.
일부 재계 관계자들은 “공정위 공무원들이 위원장 눈에 들려고 서랍 속에 있던 재벌 옥죄기 방안을 많이 꺼내고 있는 거 아니냐”는 말을 종종 한다. 이런 말이 나오는 현실은 재벌이 공정위의 한계를 알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방증이다. 로펌·대기업에서 인생 2모작을 꿈꾸는 공정위 공무원들을 걸러내고, 공피아 폐해를 실질적으로 막을 수 있는 쇄신책이 필요하다.
<오관철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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