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27개, 도봉·서대문·양천·관악·금천·강북 28개.’ 지난주쯤 카카오톡에 한 지라시가 돌았다. 이름하여 ‘안 살아봐도 알 수 있는 강남 살고픈 이유’다. 그중에 눈에 띄는 건 서울 강남구 지하철역 수가 하위 6개 자치구와 엇비슷하다는 대목이었다. ‘역세권’이란 말처럼 집값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가 지하철역이란 점에서 웃어넘길 사안이 아니다.
서울을 서북쪽으로 벗어나면 바로 작은 고개 하나를 마주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숫돌에 칼을 갈았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1㎞쯤 짧고 굽은 언덕길인데 이를 직선화하는 공사가 하세월이다. 직접 본 것만 벌써 5년이 넘었는데 아직 반쪽도 안됐다. 지난겨울 폭설엔 눈을 늦게 치워 차가 넘어가지도 못했다. 이게 경기도냐, 고양시냐, 토지주택공사(LH)냐 책임소재를 따지자는 게 아니다. 변두리는 종종 이 모양, 이 꼴이다. 서울 코앞이 그럴진대 외곽, 지방은 일러 무엇하리.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10일 오후 일자리 안정자금 신청률 80% 달성에 따라 격려 방문한 서울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에서 전국 근로복지공단 일자리 안정자금 담당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있다. 청와대제공
위에 지라시는 사실 ‘100억원대 강남 알부자’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을 겨냥해 나돈 것 같다. 장 실장이 지난 5일 라디오에서 “모두가 강남에 살 필요 없다. 살아봐서 안다”고 말한 때문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너도나도 강남 같은 곳에 ‘살고 싶어 하는’, ‘사는 게 이로운’ 현실이 문제다. 왜? 바로 교통편의에다 학습여건 등 쏠림 탓이다. 장 실장은 민주화의 근원이기도 한, 어느 국민보다 평등의식이 높은 한국인의 ‘욕망’에 굴욕감을 줬다. 강남, 강남, 서울, 서울 하지 않게 해달라는 게 ‘성’ 밖에 사는 평민들의 요구다. 실태는 어떤가. 부동산 시장에서 서울 중심은 시청이나 광화문, 서울역 따위가 아니다. 바로 강남역이다. 거기에 삼성이 있고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있어서다.
정책은 거꾸로다. 예컨대 강남 턱밑 판교에 한국판 실리콘밸리인가 뭔가를 유치했다. 판교가 어딘가. 노무현 정부가 서울 집값을 잡겠다며 개발한 신도시다. 결과는? 알다시피 제2 강남이 돼버렸다. 섣부른 공급 정책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거기에 더해 제2, 제3의 판교테크노밸리까지 키우고 있다. 대체 누구를 향한 정부인가. 장 실장 식으로 보자면 ‘굳이 강남 아니라도 판교 가서 살면 된다’는 뜻인가. 애초 판교가 아니라 기업체는 김포, 고양, 파주, 의정부, 남양주 등지나 더 지방으로 유도했어야 한다. 마곡 또한 마찬가지다.
이 문제는 아킬레스건인 자녀 학습과도 직결돼 있다. 차라리 과거처럼 강남 8학군은 살리게 내버려둬라. 대신 그 못잖은 명문 고교들을 되살리면 된다. 김상곤 식 교육개혁은 듣기 좋은, 바람직한 얘기지만 현실이 그리 녹록지 않다. 이는 그를 뺀 나머지 사람들은 거의 다 안다.
또 장 실장이 얼마 전 올린 글엔 소득주도성장을 추구하는 진정성을 믿어달라는 절규가 녹아 있다. 십분 공감하고 억울한 면도 인정한다. 다만 이 글에도 큰 알맹이가 빠졌다. 집값 얘기가 한마디도 없다. 정책실장의 현실 인식이 안이한 게 아닌가. ‘옥탑방 코스프레’ 주연인 박원순 서울시장이 내놓은 개발계획은 또 어떠한가.
원님들께 여쭤보고 싶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본 적 있는가. 어설프게 자꾸 만지작거리면 연기만 나다가 꺼져버린다. 크게 제대로 지피고는 지켜봐라. 찔끔찔끔 정책은 오히려 독만 된다. 보유세·양도세 획기적 강화, 분양가 상한제, 분양원가 공개, 후분양 같은 큰불을 붙여라. 지금까지 정부 정책은 마치 짝퉁처럼 해놓고 진품이라고 감쪽같이 속여파는 꼴 같다.
평민들에겐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 나라가 범을 막아주지 못하면 자구책을 찾는 길밖에 없다. 선량한 국민들을 부동산 투기꾼으로 내몰지 마라. 높은 지지율 덕에 잘 안 믿기겠지만, 산 아래선 다음 선거 얘기가 벌써 나온다는 걸 깊은 골짜기 사람들은 알고나 있을까.
<전병역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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