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만에 이사했다. 성냥갑처럼 비슷비슷한 대도시 아파트 생활에서도 일상의 변화가 때로는 깨달음을 가져다주곤 한다. 사실 가장 큰 깨달음은 이삿짐을 날라준 노동자 중의 한 분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에서 왔다. 그분의 지인이 최근에 장기융자까지 얻어 샀다는 집값이, 정말 부끄럽게도, 내가 생각하던 집값의 몇 분의 일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가 쓴 책에 달린 인터넷 서평에서 “저자는 높은 연봉에 평생 연금까지 보장된 철밥통의 국립대 교수이니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소감을 읽은 적이 있다. 그때 내 기분은 참으로 묘한 것이었는데, 글쓴이가 짐작하여 구체적으로 명시한 연봉이 실제로 내가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과대평가된 내 벌이가 나에 대한 비판의 소도구로 쓰일 때 받았던 약간은 억울한 느낌은 그러나 내가 갖고 있던 눈높이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가라는 깨달음 앞에 하릴없이 무릎을 꿇고 만다.
일본의 보수정권이 이른바 아베노믹스를 추진할 때, 진보적인 성향의 경제학자들 중에서도 케인스주의적 경기부양책이라거나 임금주도성장이라며 긍정적인 평가를 보낸 이들이 있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일본이 케인스가 옳았음을 보여줬다”라는 제목도 눈에 띌 정도다.
케인스는 과연 무슨 얘기를 한 것일까? 간단하다. 한 달에 100만원 버는 사람은 그 돈을 거의 다 써야 먹고살 수 있지만, 1000만원 버는 사람은 상당 부분을 저축해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 그러니 혼자 1000만원 버는 것보다는 열 명이 100만원씩 벌 때, 사회 전체적으로 소비지출은 더 많아진다. 소비지출이 많아야 상품도 팔리고 그래야 공장이 돌아가며 일자리가 생겨난다. 임금주도성장이니 소득주도성장이니 하는 개념은 케인스의 논리를 해석한 후대의 경제학자들이 다듬어낸 것이다. 임금이 그저 가능한 한 깎아내려야 할 생산비용만이 아니라 소비지출할 수 있는 능력, 즉 구매력이 된다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성장이라는 단어가 결합되면 뜻하지 않은 변화가 생겨난다. 만약 임금을 올려줬는데도 성장이 안 되면 어떡할 것인가? 모든 사회과학적 문제가 그러하듯, 여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요인들이 개입되므로 사회적 맥락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한마디로 성장이 정체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은 인간다운 삶을 누려야 한다”는 원칙에서 출발하면, 임금 혹은 소득 주도의 초점은 성장이 아니라 누구라도 표준생계비 정도는 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옮아간다. 물론 정책 초점이 그렇게 바뀌면, 즉각 기업의 경쟁력을 잃는다거나 투자의욕이 떨어진다는 등의 반발, 심지어는 좌파적 정책이라는 이데올로기 공세까지 시작될 것이다.
규제완화를 통해 경제 성장을 이끌어내려는 최경환 경제부총리 (출처 : 경향DB)
특히 한국처럼 고도성장의 집단기억이 남아 있는 곳에서 정치가는 성장에 대한 허황된 약속이라도 앞서서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여전히 성장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경제학자들도 쉽게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치가나 고급 관료들이 대체로 경제적 상층에 속하기는 하지만, 이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친기업적, 정확하게 말하자면 친부유층적인 성향을 가진다고 볼 근거는 없다. 어쩌면 익숙한 것과 결별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늘 만나고 서로 얽혀 있는 사람들의 눈높이가 사회 전체보다는 훨씬 높은 곳에 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성장률을 올리면 모든 것이 잘 풀린다는 오래된 습관과도 같은 믿음에 젖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것이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데, 스스로가 속한 계층의 물질적 이익도 지킬 수 있다.
이 아침, 어처구니없는 눈높이부터 교정하자는 다짐은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성장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일 수도 있음은 일차적으로는 이른바 진보적 경제학자들에게 주는 조언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깨달아가야 할 가르침이다. 부자친화적인 경제정책을 실행하는 정치가나 관료들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면, 사회적 압력 없이 기득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역사적 사례가 있었느냐고 되물을 것이다.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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