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 불렀다. 책 제목이기도 한 원어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inities)’가 된다. 민족이라는 것이 어떤 실체가 아니라 그저 다른 이념, 이를테면 파시즘이나 국가주의 등에 활용되는 부차적 이데올로기이자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어려서부터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단일민족’임을 믿도록 배워 온 한국인들로서는 거부감이 들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자유나 민주라는 말이 그러하듯 민족도 다 같은 민족은 아니어서 정치적 입장이나 계급적 기반에 따라 제각기 편리한 대로 끌어다 쓰는 형편임을 감안하면, 더욱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의미의 개념을 가진 이들을 철저하게 짓밟음으로써 권력을 지켜온 역사를 감안하면, 어쩌면 분단이라는 천형을 안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역설적으로 민족은 상상된 공동체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최근에 어느 책을 읽다 보니 ‘상상된 경제(imagined economies)’라는 말이 나온다. 애초에 경제라는 것 자체가 개인과 사회의 삶의 근거라는 점에서 그 어떤 다른 영역보다도 분명한 물질적 실체를 가진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은 경제에 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 기호들과 얽히면서 하나의 상상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법을 어긴 재벌 총수에게 “경제에 기여한 공로를 참작”해 관용을 베푼다거나 “이제는 정쟁을 그만두고 경제에 힘쓸 때”라거나, 심지어는 “경제를 살리자”는 지극히 중립적이어서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듯한 말들도 실상은 다른 정치적 의도를 깔고 있는 수사로서 사용되어 왔지 않은가? 마치 “내 자랑은 아니지만”이라는 말 뒤에 자랑이 따라붙지 않는 법이 없듯이, “경제”를 말할 때 그 뒤에는 경제가 아닌 것, 즉 정치나 도덕 등의 영역에서 드러난 문제를 감추거나 비틀려는 의도가 숨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경제민주화에서 시작해 창조경제를 거쳐 마침내는 구조개혁으로 가는 ‘상상된 경제’의 현란한 수사는 어차피 그 속에서 나름대로 먹고살아야 하는 정치인이나 경제관료들의 상상게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담뱃값 인상은 증세가 아니라는 주장 정도는 ‘먹고살기 위해’ 두 눈 질끔 감고 우겨보는 귀여운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어느 역대 정권도, 나아가 어느 나라 정부도 그런 상상게임을 하지 않은 적은 없으니, 굳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소위 말하는 '상상된 경제'를 꿈꾸며 상상게임을 펼치는 정부 (출처 : 경향DB)
토머스 칼라일은 19세기의 경제학을 ‘우울한 과학’이라 불렀다. 흔히 식량자원보다 급속한 인구증가로 암울한 미래를 그린 맬서스를 가리켜 그러한 것이라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 그 표현을 쓴 것은 서인도제도의 흑인노예 문제를 언급하면서였다고 한다. 수요공급의 논리에만 맡겨두려는 경제학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노예제도를 다시 도입할 것을 주장하기 위함이었다. 위대한 사상가도 뛰어넘지 못한 시대적 한계를 접어주고 생각하자면, 결국 수요공급의 논리로 모든 것이 굴러가게 마련이라는 냉담한 주장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우울함의 실체인 셈이다.
대체로 진보적 입장을 견지하는 경제학자들은 정부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경제에 개입해 적극적으로 상태를 개선하기 바란다. 현실의 정부는? 의도는 좋은데 능력이 부족하거나, 혹은 능력은 있으나 의도가 나쁜, 바꿔 말하자면 나쁜 짓 하는 능력만 뛰어난 경우가 있다. 능력도 안되고 별다른 의도도 없으나 뭔가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므로 좌충우돌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는 중에도 ‘경제’는 돌아가고 일하는 이들의 삶은 더 팍팍해지기만 하는데, 사태를 악화시킨 이들의 ‘경제’에는 아무런 균열도 없는 것, 그 틈을 파고들어 실제로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이들이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라는 주문을 외우는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진정 경제학이 우울한 과학인 까닭일 것이다.
경제학이야 우울하건 말건 그걸로 밥벌이하는 경제학자나 걱정할 일이지만, ‘상상된 경제’로 때로는 어르고 때로는 겁박하면서 ‘먹고살아 가는’ 모습을 하릴없이 바라보는 세밑은 이래저래 우울하기만 하다. 새해에는 부디 그 상상이라는 껍질이 조금이라도 벗겨지게 되기를 바란다.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경제와 세상 > 류동민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소득주도 성장을 생각한다 (0) | 2015.03.04 |
---|---|
연말정산을 설명하는 몇 가지 이론들 (0) | 2015.01.21 |
능력주의는 양날의 칼이다 (0) | 2014.11.26 |
익숙한 것과의 결별 (0) | 2014.10.29 |
개비 담배의 경제학 (0) | 2014.10.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