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정산을 설명하는 몇 가지 이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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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세상/류동민 칼럼

연말정산을 설명하는 몇 가지 이론들

by eKHonomy 2015. 1. 21.

어느 전직 고위관료가 몇천만원에 이르는 예상치 못한 세금을 내기 위해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었다나, 어쨌든 절치부심한 그가 정권이 바뀌어 복귀하자마자 한 일은 바로 그 세금을 없애는 것이었다고 한다. 종합부동산세 얘기다. 100% 사실일 리야 없지만 그럴듯하기는 하다. 남달리 일찍 연말정산시스템에 접속하여 금액을 확인하고 나니,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속삭이는 “공익을 먼저 생각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이성은 ‘세금폭탄’이라는 생활인으로서의 정서적 반응 앞에서 맥을 못 춘다. 이 비현실적인 금액이 정말 맞는 거냐고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거의 민란 수준’이라는 답변만 돌아온다.

마르크스는 어디에선가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말장난 같은 이 경구의 원래 의미는 실제로 사회를 바꿀 힘은 없이 비판만 하는 이론은 현실의 권력 앞에서 무력하다는 것이다. 물론 바로 뒤에 따라붙는 것은 “그러나 이론도 대중을 사로잡는 순간 물질적 힘이 된다”라는 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론이 별거겠는가? 사람들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나름의 방식으로 설명하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니 며칠 새 연말정산 논란을 설명하기 위해 나온 얘기들을 정리하면, 바로 이 칼럼의 제목이 된다.

그 하나는 많이 걷고 많이 돌려 받는 방식에서 적게 걷고 적게 돌려 받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라서 생기는 ‘착시현상’이라는 설명이다. 나름 논리를 갖춘 얘기라 그런지 집권세력 안에서도 유독 경제학자 출신들이 몇 명이나 동시에 비슷한 얘기를 했다. 같은 크기의 세금이라면, 미리 많이 냈다가 돌려 받는 것은 납세자의 입장에서는 이자비용을 감안할 때 오히려 손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받았다가 도로 뺏기는 것보다는 뺏겼다가 돌려 받는 쪽을 좋아한다.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도 오른 조삼모사는 그러므로 원숭이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님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행동경제학 교재의 단골메뉴인 이 이론은 “담뱃값 인상은 증세가 아니다”라는 최근의 또 다른 ‘이론’, 그리고 이 모든 ‘이론’들의 대전제인 “증세는 없다”라는 공식 입장과 서로 치고받으면서 설득력을 잃고 만다.

다른 하나는 실효세율, 그러니까 이것저것 우수리 떼고 실제로 세금 내는 비율이 낮았던 우리나라 소득세를 고쳐서 재분배기능을 강화한 것, 즉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서 돈을 걷어 어려운 사람들에게 가도록 하는 것이므로 기본 방향은 맞다는 설명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진보적이라고 분류되는 경제학자들이나 언론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는 것이다. 연봉 5500만원 기준 얘기가 자꾸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논리는 예의 고위관료가 이를 갈도록 만들었다는 종부세 당시의 논쟁 구도를 기억한다면, 적어도 지금의 집권세력에게는 스스로 앞뒤가 안 맞는 논리가 된다. 많은 직장인들의 속이 ‘민란’ 수준으로 부글거리는 것은 원래 인간이 조삼모사 고사의 원숭이처럼 멍청하거나 이기적인 속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많이 가진 자는 많이 내고 적게 가진 자는 적게 내야 한다는 납세형평성의 논리가 깨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액 자산, 즉 부동산 소유자에게 부과된 몇천만원을 ‘세금폭탄’이라고 공격하면서 실제로는 그 세금을 낼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이들조차 사로잡으려 했던 것이 그 당시의 ‘이론’이었으므로.

새누리당 이정현 최고위원이 21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연말정산 증세 논란은 잘못됐다는 내용의 발언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마지막으로 아직은 인터넷 댓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이론’ 중의 하나, 무상급식 등의 무상시리즈가 이런 결과를 낳았다는 주장이다. 그다지 논거도 없어 보이는 얘기지만 언젠가는 의외로 대중을 사로잡는 물질적 힘이 될 수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난 봄날의 비극이 엉뚱한 정치적 논란으로 흘러 버렸던 것처럼.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인터넷에는 ‘연말정산 보완책 협의, 소급적용 검토’라는 헤드라인이 뜬다. 최악은 복지건 뭐건 간에 증세는 불가능하다는 집단적 기억만 남겨 놓은 채, 엉뚱한 이론과 설명만 남는 상황이다. 언제나처럼 나쁜 결과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무엇보다도 더 나쁠 수 있다.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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