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7일 대한항공 주주총회가 열린다. 이번 주주총회에서 초미의 관심사는 조양호 회장이 다시 한 번 이사로 연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조 회장을 둘러싼 여러 불법행위 의혹 때문에 많은 시민단체들이 그의 연임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항공 주주총회는 작년에 금융위원회와 보건복지부가 나팔을 불었던 스튜어드십 코드가 과연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살펴보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하다. 만일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으로 국민연금과 기관투자가들이 정신을 바짝 차렸다면 시민단체가 반대표를 모으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될 것이다. 반대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실제로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면 시민단체의 노력은 쉽게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럼 지금 국민연금과 기관투자가들의 태도는 어떠한가? 우선 국민연금부터 보자. 국민연금은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 말도 되지 않는 이유를 살펴보자. 표면적으로 많이 거론된 이유는 소위 ‘10%룰’이다. 발행주식의 10%를 초과 보유한 주주가 경영 참여를 선언하면 그 이후부터 6개월 미만의 단기매매차익은 반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지부는 과거 매매자료를 분석해 10%룰이 적용되면 수백억원을 반환해야 한다는 계산결과를 흘리기도 했다.
이런 논리가 말이 안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과거 매매차익은 조금도 반환할 필요가 없다. 10%룰은 경영 참여를 선언한 이후 적용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10%룰의 적용을 받게 될 경우 국민연금의 주식운용 형태는 당연히 변화할 것이다. 따라서 과거 자료에 근거해 반환 규모를 추론하는 것은 전형적으로 잘못된 계산방식이다. 이 회의 자료를 만든 복지부 공무원은 적어도 거시경제학을 배우지 않았거나, 아니면 알고도 양심을 속인 것이다.
10%룰 때문에 경영 참여 선언을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도 창피하다 보니, 또 다른 변명을 슬그머니 내밀기도 한다. 경영 참여 안건은 대부분 주주총회 특별결의(출석 의결권의 3분의 2와 발행주식 총수의 3분의 1 이상) 사항이어서 어차피 통과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도 큰 설득력이 없다. 사외이사를 주주제안하는 경우를 상정해 보자.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외이사를 관철하는 방법이 표대결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대한항공의 지분 분포를 보면 한진칼이 특수관계인 지분을 포함해 대략 33%를 보유한 최대주주이고 국민연금은 10%를 넘게 보유한 2대 주주다. 그런데 10%를 넘게 보유한 2대 주주가 사외이사 한 자리를 제안하겠다고 하는데 이를 ‘머리띠 두르고 죽기살기로 반대’할 최대주주가 있겠는가. 더구나 국민연금은 한진칼의 3대 주주이고 이미 한진칼에 대해 경영 참여를 천명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객관적으로 합당한 인사를 대한항공의 사외이사로 추천할 경우 과연 한진칼이 표대결까지 벌이면서 부결시킬지는 진정 의문이다. 그런데 표대결에서 질까 봐 사외이사 주주제안을 포기했다고?
다른 기관투자가들은 어떠한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국내 의결권 자문사 중에서 서스틴베스트가 조 회장의 연임에 반대의사를 표했다는 소식은 들린다. 다른 의결권 자문사 의견을 모르는 상황에서 속단할 수는 없으나, 서스틴베스트가 이미 반대 권고를 한 상황이어서 기관투자가들이 마냥 행복하게 조 회장의 연임에 ‘만세 삼창’으로 화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적어도 스튜어드십 코드가 작동한다면 그래야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 속 시원하게 이 사안에 대해 의견을 표명한 기관투자가는 잘 안 보인다. 어쩌면 ‘영혼없이’ 치열한 눈치작전 중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기업들이 나눠줄 떡고물의 단맛 때문에 충실의무니 스튜어드십 코드니 하는 거추장스러운 단어는 이미 잊은 지 오래일 수도 있다.
왜 이런 상황일까. 포장만 바꾸었지 근본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본이란 무엇인가? 수탁자는 위탁자인 고객의 입장을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민연금이 과연 연금 가입자의 입장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가? 이제까지의 증거는 부정적이다. 섣부르게 제일모직-삼성물산 간 부당합병에 만세 불러서 막대한 손실을 입고, 최근에는 인도네시아 담배회사에 석연치 않은 정황 속에서 투자하여 350억원가량의 투자원금이 휴지조각이 되었다. 이게 수탁자 책임을 위하는 것인가?
기관투자가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들에게 돈을 맡긴 고객들의 이해관계보다 기업 소유주의 이해관계를 더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부터 국민연금과 복지부의 기금운용 권한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왜 남의 돈 맡아서 잘 관리하지도 못하면서 폼을 잡는가. 그 돈의 종착역은 결국 국민들이다. 그런데 정작 국민은 그 돈의 운용에 대해 직접적으로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별도의 선택지도 없다. 그저 주야장천 거기에 ‘강제’로 돈을 맡길 뿐이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자신이 수익할 재산은 자신이 운용하거나 적어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왜 인도네시아 담배회사에 떼돈을 투자하고, 횡령·배임 등 각종 불법행위 의혹을 받고 있는 자가 경영하는 회사에 돈을 퍼붓고 있는가.
지금이라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를 폐지하고, 그 돈을 일정한 자격을 갖춘 자산운용사에 넘겨야 한다. 국민연금이 운용하는 주식 규모가 130조원가량 된다. 이 돈을 10조원씩으로만 쪼개도 번쩍번쩍한 자산운용사를 10개 넘게 만들 수 있다. 어떤 돈이 어떤 운용사에 갈 것인지는 가입자가 정하도록 하면 된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운용 성과를 평가하여 쓸데없이 인도네시아 담배회사에 투자하다가 돈을 날린 자산운용사가 있다면 그 자산운용사에 돈을 맡긴 연금 가입자들이 가차없이 돈을 빼서 다른 운용사로 옮길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러면 국민연금의 비효율성도 없어지고, 자산운용사들은 정신을 바짝 차릴 것이다. 시중의 100조원 주식투자 자금이 스튜어드십 코드 없어도 고객 우선의 투자를 생활화하게 될 것이다. 국민연금이 정신을 차렸는지 3월27일의 리트머스 시험지를 주시해 보자.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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