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일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
요즘 들어 유력한 대통령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재벌의 기업지배구조를 손보겠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에 대해 재계는 재벌그룹 계열사들의 투자 위축을 가져올 것이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과연 누구 말이 맞는 것일까?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 외환금융위기의 원인 중 하나로 ‘왜곡된’ 기업지배구조가 지적되면서 주주권 이론에 따른 기업지배구조 개혁이 단행되었다. 목표는 투명성 강화와 함께 소수 주주권 강화와 기업경영권 시장(즉 적대적 M&A 시장)의 활성화였다. 이를 위해 상법과 증권거래법, 공정거래법 등 기업지배구조 관련 법제도가 크게 변했다. 집중투표제와 펀드 의결권 행사, 출자총액제한제도, 외국인의 국내 기업 주식 취득 한도 폐지와 외국인의 국내 주식 10% 이상 취득 시 해당 기업 이사회 동의 요건 폐지가 그때 이루어졌다.
장하성 교수 (경향신문DB)
안철수 후보 측의 장하성과 박경서, 그리고 문재인 후보 측의 김진방 같은 경제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신봉하는 주주권 이론에 따르면 주식투자 펀드들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주주자본주의형 기업지배구조 개혁을 하더라도 기업의 실물 투자는 위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주자본주의가 활성화되면 자본시장이 활성화되고 그에 따라 나스닥, 코스닥 같은 기술주 시장과 함께 벤처캐피털 투자도 활성화되어 정보기술(IT), 생명공학(BT), 나노공학(NT)같은 급진적 기술혁신 산업이 발전하기 때문이다. IT업종에서 성장해 미국 실리콘밸리를 동경해온 안철수 후보의 경우 이들 학자의 주장을 신뢰하는 것으로 보인다.
장하성과 김진방 같은 경제학자들은 우리나라처럼 ‘추격’ 단계를 끝내고 ‘탈추격’ 단계에 접어든 나라에 필요한 것은 굴뚝산업에나 적합한 점진적 기술 혁신보다는 IT, BT, NT같은 지식집약 산업에 적합한 급진적 기술 혁신이며, 따라서 한국의 산업 발전을 위해서도 이제는 미국 월스트리트 형의 기업지배구조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해왔다.
그렇지만 과연 우리 경제의 기술력 수준이 이미 탈추격 단계, 즉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별로 그렇지 않아 보인다. 물론 삼성과 LG, SK, 현대기아차그룹과 같은 상위 4대 그룹에 속한 대기업들은 전기·전자와 반도체, 통신, 자동차 등의 업종에서 이미 선진 대기업들의 기술력을 추격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요즘은 세계적으로 기술 선도자의 지위까지 넘보고 있다. 이들 4대 재벌그룹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R&D) 투자액 역시 계속 증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5~30대 재벌그룹 계열사들, 그리고 남양유업과 샘표간장 같은 일반 대기업들은 별로 그렇지 않다. 이들 그룹 계열사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율은 지난 10년간 1% 내외에서 완전히 정체된 상태이다. 즉 기술 혁신을 통한 성장은 우리나라의 대다수 대기업들에서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다. 왜 그럴까? 그 직접적인 원인은 이들 대기업의 주력 업종 대다수가 그 자체 특성상 기술투자를 중심으로 하는 혁신이 경쟁력 확보를 위한 주요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대형마트와 백화점, 건설업과 부동산 개발, 유무선 통신업, 식품·음료와 술, 석유화학과 일반화학 등의 업종인데, 이들 업종은 기술 혁신보다는 정·관계 인사들에 대한 로비와 결합된 규제 완화와 담합, 즉 이권추구(rent-seeking) 행위가 기업경쟁력 확보를 위해 중요하다. 게다가 재벌그룹과 대기업들의 무능한 후계자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품질과 기술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수출제조업보다는 로비와 담합을 통해 손쉽게 실적을 낼 수 있는 이런 업종을 선호한다.
그렇다면 차기 정부는 어떻게 이들 대기업을 ‘혁신을 통한 성장’으로 드라이브할 수 있을까? 새로운 차원의 산업정책이 필요하다. 이들 재벌그룹과 대기업으로 하여금 기술 혁신이 중요한 업종으로 적극적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라면 이들 재벌그룹과 대기업이 신규 계열사(자회사)를 창출하거나 인수하는 것도 적극 장려해야 한다.
하지만 단기주의적인 주식투자 펀드의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놓는 주주권 이론에 따르면 대기업의 사업 다각화, 특히 비관련 다각화는 모두 대기업 대주주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와 사익추구 행위에 불과하다. 따라서 주주권 이론은 모든 종류의 사업 다각화를 반대했다. 실제로 1998년 이후 주주권 이론에 따라 개혁된 상법과 증권거래법, 공정거래법은 모두 소수 주주권 강화와 적대적 M&A 활성화를 통해 단기적 주식 투자자들의 이익이 기업의 미래투자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을 크게 높였다. 그리하여 대기업들의 과감한 사업 다각화를 힘들게 만들었다. 30대 재벌그룹과 일반 대기업들도 기술 혁신이 중요한 신규 업종으로의 과감한 진출이 어렵게 되었다. 그렇지만 주주자본주의의 전성시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끝났다. 이제 미몽의 시대는 끝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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