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일칼럼]줄푸세와 경제민주화는 함께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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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경제칼럼

[정승일칼럼]줄푸세와 경제민주화는 함께 갈 수 없다

by eKHonomy 2012. 12. 20.

정승일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 sijeong11@naver.com


세 차례에 걸친 대통령 후보 TV토론이 화제다. 사실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문재인과 박근혜를 비롯한 대다수 대선 후보들이 너도나도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 일자리 창출을 말하는지라 각 후보 캠프의 공약과 정책이 뭐가 다르다는 건지 실감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TV토론이 진행되면서 각 후보 간의 차이를 보통 사람들도 확실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문재인과 박근혜 두 후보 간의 공약 차이는 TV토론의 자리에서 후보들이 약속한 복지재정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문재인 후보는 지금보다 연평균 39조원 많은 복지예산을, 박근혜 후보는 27조원 많은 복지예산을 조정해 사회복지를 확충하겠다고 한다. 양자 간의 12조원의 차이는 문재인 후보처럼 보편적인 등록금 인하 방식으로 할지, 아니면 박근혜 후보처럼 선별적인 국가장학금 확대 방식으로 할지, 즉 보편복지냐 선별복지냐의 복지철학 차이로 나타난다.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에서도 두 후보는 큰 입장 차이를 보였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도 ‘정부 규제를 통해 풀겠다’(문재인), ‘기업 공시를 통한 시장 자율에 맡기겠다’(박근혜)로 차이를 보였다.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볼 때 두 후보 간 차이는 결국 정부냐 시장이냐의 측면에서 볼 수 있다. 문재인 후보는 국가 개입, 특히 복지국가적 정부 개입을 늘리는 정책 노선을 말하고 있고, 반면에 박근혜 후보는 되도록이면 시장 또는 기업의 자율에 맡겨야 하며 국가 개입은 필요한 만큼만 늘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한구 원내대표와 대화하는 박근혜 (출처; 경향DB)


박근혜 후보가 자신의 경제철학을 TV토론에서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은 “줄푸세와 경제민주화는 상충되지 않는다”는 발언이었다. 그런데 이 발언만큼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의 갈지자 횡보를 보여주는 것도 없다. 지난 5년간의 행보를 볼 때 박근혜 후보의 노선은 뚜렷이 변화했다는 평을 들어왔다. 2007년 말의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당시 이명박 후보와 경쟁할 때만 해도 박근혜 후보는 시장만능주의자였다. 즉 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자는 뉴라이트 자유주의자들의 ‘줄푸세’ 슬로건을 그대로 내세웠다. ‘줄푸세’는 또한 이명박 정부가 즉각 실행에 옮긴 노선이기도 하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의 생각은 2008년 말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가 터진 이후부터 상당히 달라진다. 시장만능주의가 아닌 ‘규율 있는 자본주의’(disciplined capitalism)가 필요하다고 하는가 하면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 건설이었다”고 발언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게다가 작년 10월의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패해 위기에 처했을 때는 김종인, 이상돈 같은 건전보수 인사들과 함께 한나라당을 재편해 새누리당을 만들면서 이명박 정부식의 시장만능주의를 버리겠다고 천명했다. 이른바 ‘건전보수’의 노선인 보수적 국가개입주의, 즉 적절한 수준에서 복지국가도 하고 세금도 거둘 것은 거두며 정부 규제도 필요한 것은 하는 방향으로 전환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변신한 모습의 새누리당이 4·11 총선에서 승리하자 새누리당 내에서 시장만능주의가 다시 발흥하기 시작했다. 박근혜 캠프와 새누리당 안에서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과 이한구 원내대표 등이 그간 대립해온 이유는 두 사람이 대변하는 사상과 노선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박근혜 후보가 1년 전 한나라당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어렵게 모셔온 김종인이나 이상돈 같은 분들만 해도 건전한 보수주의자, 그러니까 시장만능주의로는 안되고 적절하게 국가가 개입해서 사회복지도 늘리고, 재벌개혁도 하고, 비정규직 채용도 규제하고, 노동조합의 역할도 확대하는 이른바 ‘경제민주화’를 해야 한다고 보는 분들이다. 그에 반해 새누리당 의원의 다수는 이한구·정몽준 의원처럼 시장주의에 물든 이들이며 상당수는 뉴라이트 자유주의를 확고하게 신봉하는 이들이다.


박근혜 캠프와 새누리당 내에서는 김종인 같은 건전보수 경제민주화론자들과 이한구 같은 시장주의자들 간에 노선·이념 분쟁이 일상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렇지만 당장은 선거가 코앞인 상황이어서 당이 분열되면 안되니 임시로 봉합하는 모양새로 가고 있다. 그리고 그 봉합을 위한 발언이 바로 박근혜 후보의 “줄푸세와 경제민주화는 상충되지 않는다”는 억지논리였다. 이명박 정부가 시행한 5년간 100조원 규모의 부자 감세가 중산층과 서민들에게도 큰 혜택을 주었다는 박근혜 후보의 TV토론 발언 역시 마찬가지의 자가당착적 억지다.


뉴라이트의 ‘줄푸세’ 논리와 경제민주화, 복지국가가 함께 갈 수는 없다. TV토론의 승자는 분명했다. 향후 5년간 대한민국을 이끌 세력은 민주공화국의 헌법 정신에 걸맞은 국가개입주의, 즉 복지국가 및 경제민주화 5개년 계획의 실행을 담당할 이들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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