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이맘때 한 장관이 식사자리에서 현대차그룹 고위 관계자와 만난 사실을 전했다. “수소차충전소를 건립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데…. 한국에서 수소차 만드는 회사가 몇 개냐고 되물었어요.” 명백한 특혜가 될 수 있으니 지원할 수 없다는 뜻이 분명했다.
지난 15일 열린 국정현안점검회의에서는 수소차 관련 규제를 대폭 풀기로 결정했다. 수소 충전소를 준주거지역과 상업지역, 철도 인근에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 인허가 기간 단축과 압축수소 운송 용기 규제 완화 등도 포함됐다. 회의를 주재한 이낙연 국무총리는 “장관들이 현장 목소리를 더 자주 듣고 자기 부처의 작은 규제라도 신속히 개선해 나가주시기 바란다”고 했다. 현대자동차의 수소전기버스가 21일부터 서울 시내버스 노선에 시범 투입됐다. 울산에 이어 두번째 수소전기버스 운행이다. 내년부터는 전국 6개 도시에서 총 30대의 수소전기버스가 달리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해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최근 상황을 보면 이른바 ‘수소경제 생태계’ 확산에 정부가 발벗고 나선 듯하다. 1년 만에 상황이 급변한 것은 대통령 덕분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월 프랑스를 방문해 현대차 수소전기차 ‘넥쏘’를 시승했다. 이후 대통령 지시에 따라 관련 규제를 없애기 위한 각 부처의 노력이 뒤따랐을 것이다.
가상통화 투기 열풍이 불던 지난해 9월 정부는 ‘범정부 가상통화 TF(태스크포스)’ 회의를 열고, 규제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후 거래실명제 전환, 금융기관 가상통화 투자 금지, 미성년자와 외국인 거래 금지 등의 방안을 발표했다. 가상통화 TF는 지난해 말 주무부처를 국무조정실로 옮겼지만 지금까지 뚜렷한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다.
정부는 가상통화는 규제하되 블록체인 기술은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실제 관세청의 ‘전자상거래물품 개인통관 서비스’와 농림축산식품부의 ‘축산물 이력관리 시스템’은 블록체인에 기반한 신기술이다. 그러나 정부가 채택한 것은 가상통화가 필요 없는 ‘프라이빗 블록체인’으로 블록체인 기술의 극히 일부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퍼블릭 블록체인’이 진정한 블록체인 기술이라는 것이다. 퍼블릭 블록체인은 가상통화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는 “공공에서 블록체인이 거래되기 위해서는 장부를 기록한 사람에게 암호화폐(가상통화)가 보상으로 주어져야 하는데, 암호화폐를 죽이면 블록체인도 성장하지 않는다”고 했다.
가상통화 거래소를 운영하는 한 기업은 지난 2월 싱가포르에 지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본사에서 지사로 자금을 한 푼도 보낼 수 없다. 은행 담당자는 “감사에 걸릴 수 있어 가상통화 거래소 해외송금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만 했다. 금융위원회와 기획재정부는 소관이 아니라며 떠넘기기만 하고 있다.
블록체인 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내 게임 개발 수준이 세계 최고인 것처럼 블록체인도 한국의 인력과 기술 잠재력이 가장 높다. 하지만 스타트업과 인력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고 전했다. 우량하다고 평가받던 가상통화 거래소가 문을 닫거나, 사기를 치는 거래소까지 나오고 있다. 정부가 블록체인과 가상통화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지 않아 빚어진 일이다. 지금 블록체인이 처한 상황은 1990년대 인터넷 벤처 열풍과 비슷하다. 인터넷 벤처는 거품이 빠지면서 옥석이 가려져 네이버, 카카오 같은 기업이 성장할 수 있었다.
수소충전소 규제를 푼다면 독점적으로 수소전기차를 생산하는 현대차그룹에 특혜가 될 것이 분명하다. 가상통화 거래소도 그대로 뒀다간 큰 손실을 본 투자자가 속출하고 사회문제로 번질 게 뻔하다.
그렇다면 득실을 따져야 한다. 정부가 수소충전소 규제를 푼 것은 특혜보다 큰 산업효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업계에서는 아직도 규제가 많다고 하소연한다. 정부는 업계의 고충을 받아들여 꼼꼼히 확인해서 묶을 것과 풀 것을 가려내야 한다. 그게 정부가 할 일이다. 업계에서 “차라리 규제라도 해달라”고 하소연하는 가상통화와 블록체인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가 블록체인으로 들썩이는 상황에서 관련 부처가 지금처럼 복지부동하다가는 건전한 업체마저 쓰러지고, 한국은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은 며칠 전 반부패정책협의회에서 “더 본질적 대책을 보고하라” “현장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며 장관들을 질책했다. 장관이 잘 모르는데 관료조직이 움직일 리 없고 정책이 나올 수 없다. 혁신성장이니 신성장동력 발굴이니 말로만 외칠 게 아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민원이 밀려들고, 기업이 대통령 입만 바라보는 것은 장관들이 제대로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호기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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