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2009년 신종플루 기억이 났다. 당시는 집에 유치원생이 있었기에 불안감이 지금보다 더 컸다. 그러던 어느 날 ‘구세주’가 손에 들려 있었다. 어렵사리 구한 타미플루다. 항간에는 짝퉁들도 판을 쳤다던데 글쎄…. 어쨌든 이걸 서랍에 넣어두니 부적처럼 든든했다. 코로나19가 누그러지고 있다지만 여전히 공포심이 팽배해 있다. 주가도, 유가도 집어삼키며 세계 경제까지 감염시킬 태세다.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확산되기 전에 우리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1월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선 전자전시회 CES 2020이 열렸다. 자율주행차, 인공지능(AI) 같은 이젠 낯설지도 않은 낱말들이 인류의 미래라고 그려졌다. 어떤 이들은 집값, 주식, 명품 등에 눈이 돌아가 있었다.
이런 욕망들을 비웃듯 코로나19가 뒤통수를 때렸다. 코로나19는 오늘날 우리를 비추는 거울 같다. 삶의 근본 가치, 정작 중요한 게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생존 걱정 앞에 자율주행, AI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인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하나에 인류가 떤다.
미국 중서부로 일컬어지는 시골에는 첨단과는 거리가 먼, 옥수수나 콩밭 가운데 아미시라는 종교공동체들이 있다. 전기, 전화, 차 같은 문명의 이기는 억제하고 사는 곳이다. 옛날 드라마 <초원의 집>에나 나오던 옷과 마차가 보인다. 코로나19는 애써 이런 곳까지 찾아들 이유가 없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아메리카 인디언은 신대륙을 발견한 그 조상들이 몰고온 ‘독감’ 탓에 다수가 몰살됐다. 서구의 총, 칼이 아닌 바이러스 탓이라고, <총, 균, 쇠>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 같은 이들이 주장해왔다. 가축 등을 따라 건너온 천연두, 홍역 같은 병균을 처음 접했던 원주민들은 이겨낼 수 없었다고 한다. 호주 등지의 원주민들 또한 유럽의 바이러스 탓에 떼죽음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는 제1 행동수칙이 무엇인가. 바로 격리다. 우린 너무 과도하게 친밀해졌다. 대도시로, 아파트로, 초고층 빌딩으로 바벨탑을 쌓아 올렸다. 몰려서 할 일이라곤 남과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것들이다. 더 비싸고 맛난 것들을 취하며 위험을 증폭시켜온 게 아닐까.
지난 역사들이 그랬듯, 언젠가는 또 기존 약으로 듣지 않는 변종 바이러스들이 어디선가 피어나고 한바탕 홍역을 치를 것이다.
이런 전염병은 배에 기름이 차도록 필요 이상 먹고, 즐기고, 노느라 자연의 일부인 자신을 파괴해온 대가일 수 있다. 박쥐든 누구든 숙주가 무슨 죄인가. 이제 더 절제하고 흩어져야 한다. 비록 모두가 들판, 산속으로 뿔뿔이 숨어들어 아미시로 살 순 없지만 말이다.
Hoc quoque transibit(이 또한 지나가리)!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어야 한다. 고통의 시간은 곧 스쳐 가겠지만, 생생한 깨달음이라도 얻는다면 다행이다.
너무 겁먹지도, 호들갑 떨지도 말자. 산책길에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고 미개인 보듯 할 건 아니다. 손이나 씻고 차분히 대응하면 된다. 공포 그 자체가 더 공포스러운 법이다.
‘#힘내라 TK, 우리가 남이가!’
<전병역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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