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전쟁, 그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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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김수행 칼럼

환율전쟁, 그 다음은?

by eKHonomy 2010. 10. 11.

김수행|성공회대 석좌교수

2007년 12월에 시작된 미국의 경기후퇴가 2009년 6월에 끝났다고 미국의 전국경제조사국(NBER)이 지난 9월에 발표했다. 하지만 작년 6월 이래 아직도 실업률은 높고 경기회복 속도는 더디기 때문에 경기후퇴의 종점을 찾기가 어려웠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사실상 이번의 경기후퇴는 1929년에 발발한 대공황처럼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재편성과 몰락의 징조이기 때문에 그 종점을 언제로 잡을까가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경제의 문제점이나 과제가 계속 바뀌면서 세계 차원에서 사회·정치·군사적 파국을 야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번의 대공황이 점점 더 확대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9월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이 이번 대공황의 시발점이었다고 하자. 대출상환 능력도 없는 사람들에게 온갖 미끼를 던지면서 거액의 모기지대출을 ‘개시한’ 금융기관들과, 비우량 모기지대출을 근거로 온갖 엉터리 파생증권들을 만들어 ‘판매한’ 금융기관들이 파산하면서 대공황이 온 것이다. 처음에는 정부의 거대한 구제금융으로 금융기관들의 파산만 막으면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믿었지만, 이제는 정부의 파산이 당면과제로 떠올랐다. 금융기관도 살리고 경제성장도 촉진한다는 재정금융팽창정책이 쑥 들어가고 국가채무와 재정적자를 줄이는 긴축·내핍정책이 강력하게 등장했다.


실업 확산 자본주의체제의 위기

이것이 2010년 5~6월의 일인데, 노동자와 서민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하여 사회적 혼란이 당면과제로 제기되었다. 번영이 지속된다는 ‘새로운 경제’의 환상이 깨진 20세기 말부터 노동자와 서민은 일자리를 만들어 의식주 생활을 보장하라고 외쳤지만 정부와 중앙은행은 ‘돈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는데, 공황의 책임자인 금융기관을 구제하는 데 사용한 수조달러의 ‘돈’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이런 구제금융과 부자감세로 말미암은 재정적자를 정부가 사회보장적 지출의 삭감과 퇴직연령 인상, 공무원 수와 봉급의 삭감, 간접세 인상 등으로 모든 부담을 노동자와 서민에게 지우려는 것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개인적인 이윤추구에 혈안이 된 지배계급과, 거대한 생산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민들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본주의체제 그 자체에 대한 분노가 세계 전체로 번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각국 정부가 아무리 묘수를 써 봐도 생산은 증가하지 않고 실업자도 줄지 않으면서 인민의 불만만 쌓여갈 뿐이었다. 정부와 지배계급은 이 ‘훌륭한’ 자본주의체제를 위기로부터 구하기 위해 인민을 기만하는 ‘민족주의’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한편으로는 이슬람혐오주의, 이민억제와 불법이민자 추방운동 등의 극우민족주의가 힘을 얻어 상당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고, 다른 한편으론 수출 증진을 통해 국내의 대공황으로부터 탈출하려고 무역·통화전쟁을 개시하면서 상대방 국가들을 중상모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애국주의적 시도들은 사실상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이나 다름없다.

1930년대 2차대전 발발의 원인

국내에서 극우민족주의가 거세게 나타나면, 히틀러시대처럼 사회의 양심이 마비되고 토론의 자유가 사라지면서 대외침략을 ‘생활권’의 확대로 당연시 할 수 있다. 더욱이 미국은 하원에서 중국이 위안화 평가절상을 거부하는 것에 대응하여 중국 상품에 관세를 높게 부과하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또한 미국은 국제통화기금 총회에서 회원국들로 하여금 ‘자국 통화 가치를 너무 낮게 유지하고 외환보유액을 과잉 보유하는 나라들’(예컨대 중국, 일본, 독일)에 평가절상을 요구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총회는 환율문제를 논의하지도 못하고 끝났다. 1930년대에는 환율전쟁이 제2차 세계대전을 낳았다. 이윤을 더 많이 얻으려고 자국과 타국의 인민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체제를 폐기하면, 모든 과학기술적 진보를 이용하여 모든 나라의 모든 인민이 함께 평화롭게 사는 새로운 세상이 탄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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