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4차 산업혁명, 말의 성찬 대신 성찰이 필요한 때다
본문 바로가기
온라인 경제칼럼

[기고]4차 산업혁명, 말의 성찬 대신 성찰이 필요한 때다

by eKHonomy 2017. 7. 3.

먼 미래로 여겨졌던 4차 산업혁명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신문, 방송의 뉴스도 연일 4차 산업혁명으로 가득하다. 정부부처나 지자체 그리고 공공기관들은 새로운 사업계획을 발표하거나 행사를 할 때 어김없이 4차 산업혁명을 키워드로 들이댄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각계 전문가들의 진단도 빠지지 않는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얘기가 이렇듯 풍성하니 일반국민들도 웬만한 전문가가 됐을 법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5월 초에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니 응답자의 59.8%가 ‘산업혁명은 곧 인공지능’이라 생각했고 나머지 응답도 ‘정보기술(IT)’ ‘로봇’과 같은 기계·기술적인 것으로 채워졌다. 또 82.6%는 ‘4차 산업혁명이 인류에게 혜택을 줄 것’이라 했지만 63.7%는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불안감을 내비쳤다. 의미심장한 결과지만 국민들의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인식이 단편적 지식에 의존하고 있으며 막연한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면서 혼란스러워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언론을 통해 4차 산업혁명에 대해 그렇게 풍성한 말의 성찬이 펼쳐졌는데, 국민들은 왜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가.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그 많은 얘기들이 성찰 없이 파편적이고 표피적인 수준에 그쳤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이 그렇게 단순화할 수 있는 것인가.

 

알려진 대로 4차 산업혁명의 발원지는 2016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이다. 이 포럼은 1980년대 후반 이후 세계경제가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되면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첨병’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세계 NGO로부터 집중포화를 받은 적이 있다. 그리고 <4차 산업혁명>의 저자인 클라우스 슈바프는 당시 이 포럼 창립을 주도한 주인공이다. 슈바프의 이런 이력 때문에 선입견이 들기도 했지만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터라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슈바프의 저서는 단순히 자연과학과 테크놀로지 분야의 미래 혁신만을 다루는 책이 아니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도덕, 환경 등과 같은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했으며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혜안까지 녹아 있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를 앞두고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을 것이다. 해야 할 말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세계경제포럼발 4차 산업혁명의 파고가 일기 시작한 2016년 4월, 스위스 최대은행인 유니언뱅크가 발표한 ‘국가별 4차 산업혁명 적응준비 순위’에서 한국은 139개국 중 25위였다. 중국(28위)보다 다소 나았지만 일본(12위), 대만(16위)보다 크게 뒤졌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83위로 하위권이었다. 유니언뱅크가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전문가나 인적 자원의 수준을 조사하지는 않았지만 이 분야에서도 내세울 게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미래를 보는 안목, 4차 산업혁명 준비수준,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성찰 없이 전개될 말의 성찬은 어쩌면 끔찍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지난 정부에서 정체불명의 ‘창조경제’가 몰고 온 정책적 실패가 대표적 사례다. 국가 전략사업의 핵심 키워드로 창조경제란 슬로건이 난무했지만, 정작 그 업무를 직접 담당하는 사람들조차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개념도 없고, 비판적 성찰도 없었으니 일반국민이 느끼는 혼란감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은 그 많은 논의에도 불구하고 아직 명확한 개념정의조차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 변화의 폭과 규모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의미다.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나 대응이 비판적 성찰 없이 이루어질 때 그 피해는 고스란이 국민에게 전가된다.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힘의 원천을 잃게 될 수도 있다. 국민적 공감대 형성과 자발적 참여야말로 가장 중요한 동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4차 산업혁명을 위한 본격적인 출발을 위해 국민들이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동참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말의 성찬 대신 성찰의 메시지가 울려 퍼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황치성 | 언론학 박사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