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다시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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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경제칼럼

문제는 다시 민주주의다

by eKHonomy 2014. 2. 12.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서양 속담은 그 자체로는 참이다. 그러나 친구의 기쁨을 거리낌 없이 기뻐해 주기가 어려울 때 같이 아파해 주기보다 더 힘들 때가 있다. 너무 아픈 사랑만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다. 너무 부러워도 부럽다 말하지 못한다. 마음의 우선순위를 따져 서넛 안에 드는 지인에게 부러울 만큼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나는 함께 기뻐해 주는 마음 한편으로 그 때문에 생겨날 그와 나의 정치·경제·사회적 권력 격차가 가져올 불편함도 걱정하곤 했다. 부끄럽게도 내게 생기는 좋은 일은 누려 마땅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주변의 누군가가 느낄 불편함에 대해서는 배려하려 들지 않았다.


이를테면 자타가 인정하는 ‘매우 좋은’ 대학의 교수를 만나면, 그이에 비해 결코 뒤처지지 않는 나의 특성을 이것저것 찾아보며 위안을 삼다가도 그가 가진 사소한 장점이나 힘 하나에 자존감을 속절없이 무너뜨리곤 했다. 마치 질 수밖에 없는 강력한 연적을 둔 비극적인 사랑에 빠진 이의 심정처럼. 그 강력함이 외모나 재능, 언변 같은 개인적 속성에서 나오는 것이건 그 어떤 제도적 속성에서 나오는 것이건 결과는 다르지 않다. 사랑을 잃은 이에게 더 좋은 사랑이 남아 있다는 말이 위로가 되지 않듯이, 언젠가는 너에게도 좋은 기회가 올 것이라는 말은 결코 위로를 주지 못한다.



삼성그룹이 대학별로 신입사원 총장추천인원을 할당한 것은 거센 비판여론 때문에 없던 일이 됐다. 삼성은 어느새 한국 사회에서 세속적 성공의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잡은 만큼, 이번 일에 대한 반응도 복잡미묘하다. 상대적으로 적지 않은 할당인원 때문에 내심 뿌듯해하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할당인원이 생각보다(혹은 생각한 대로) 적어서 시쳇말로 열폭하는 경우도 있다. 해묵은 지역감정이 건드려지는가 하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꽤 그럴듯한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반응이 이토록 복잡미묘한 까닭은 실상 우리의 욕망, 그 작동방식 자체가 그만큼 복잡미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벌문제가 걸릴 때면 항상 등장하는 능력주의가 지닌 양날의 칼과도 같은 속성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능력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집착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순수한 능력만 겨루도록 경쟁의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로부터 고립된 개인이 있을 수 없듯이, 그 어떤 진공 상태에서 존재하는 “순수한 능력”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능력을 어떻게 정의하는가도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합의의 문제이며, 그 사회란 결국 개인들이 모여 이루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필요 이상의 자부심과 부당한 열등감에 빠지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 그리고 그 미래는 바로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결국 두 번째 기회, 아니 세 번째, 네 번째 기회를 주는 것, 더욱 근본적으로는 삼성이건 어디건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존재의 의미를 누릴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만들어 주는 것이 핵심이다. 복지국가나 경제민주주의가 논의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자본의 오만함이나 방약무인을 욕하기는 속이 후련하면서도 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출신 대학이 능력을 나타내는 시그널로 사용되는 누구나 아는 그 현실을 이윤추구 조직인 기업에 모른 체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망하기 때문이다. 이미 하던 일이 드러났을 뿐이며, 삼성이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할 것이다. “능력”이 개인의 출신 배경이나 인맥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대될수록 이러한 현상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학벌문제의 핵심은 노동시장의 문제이므로, 입시제도를 아무리 바꿔보아도 노동시장과 연계되지 않는 한 백약이 무효인 셈이다. 대학교육이 자본으로부터 자율성을 얻기 위한 노력은 물론 교육부로 상징되는 국가기구의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나쁜 자본”을 욕하는 것처럼이나 “나쁜 국가”를 욕하는 것 또한 문제를 없애지는 못한다. 노동, 그리고 시민이 자본과 국가에 대해 끊임없이 요구할 때에야 비로소 “덜 나쁜 국가”라도 얻어질 수 있다. 결국 문제는 다시 민주주의인 것이다.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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