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용차 부문에는 진출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 1992년, 삼성중공업의 김연수 사장이 자동차 업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상용차 시장에 진출하면서 했던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애초부터 지킬 의도가 없었던 약속이었다. 승용차 산업은 이건희 회장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삼성은 바로 이듬해인 1993년부터 삼성생명 자금을 동원해서 기아자동차 주식을 매집했다. 그러더니 결국 오만 군데 로비를 해서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 공장을 짓는 조건으로 1994년 승용차 시장에 진출했다. 삼성은 약속 파기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목적을 달성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세상 이치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하늘이 약속 파기를 호되게 심판한 것이다. 삼성자동차는 IMF 외환위기의 한 원인을 제공하더니 결국 1999년 6월30일 법정관리를 신청하고 이 세상에 하직을 고했다. 4조3000억원의 부실만 남긴 채. (이 부실자산을 돈 받고 인수해서 재기를 도모하려던 대우그룹도 함께 날아갔다.) 승용차 시장의 발판으로 사용했던 삼성상용차는 2000년 12월12일 파산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20년이 흐른 지금,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하나금융지주가 2012년에 했던 약속을 정확히 2년도 안돼 파기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조금 더 심하다. 했던 말을 꿀꺽 삼키는 식언(食言) 수준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종이쪽지를 찢어버리려 하고 있다.
김승유 하나금융그룹 회장이 론스타 회장과 만나 외환은행 인수를 위한 주식매매계약서에 최종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주지하듯이 하나금융지주는 온갖 논란 속에 2012년 2월 론스타로부터 외환은행 주식을 매입해 외환은행을 자회사로 편입했다. 물론 론스타가 외환은행의 합법적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거래는 무효다. 따라서 그때 많은 사람들이 이 거래를 문제 삼았다. 마치 삼성이 승용차 시장에 진입하는 것에 대해 사회가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던 것과 흡사한 상황이었다.
이때 하나금융지주가 선택한 수단 역시 판박이처럼 똑같았다. 외환은행을 절대로 무리하게 합병하지 않겠다고 대외적으로 약속을 한 것이다. 2012년 2월 하순에 체결된 노사정 합의서의 제1조 제1항이 “외환은행의 독립법인 유지”이고 제2항이 “5년 경과 후 노사가 합의할 경우 합병 문제 협의 가능”이기 때문이다. 약속을 보다 명확히 하겠다고 김승유 하나지주 회장, 윤용로 외환은행장이 김기철 노조위원장과 함께 서명을 했고, 금융감독당국의 수장인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입회인으로 서명했다.
2년 사이에 무슨 마법이라도 걸린 걸까. 마치 모범답안을 따르듯 삼성에 뒤이어 하나금융지주도 약속 파기의 길을 선택했다. 김정태 회장이 합병을 선언하고, 두 은행의 은행장이 합창하는 형국이 벌어졌다. 조만간 두 은행의 이사회도 이 길을 함께 가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삼성처럼 이곳저곳을 동원해서 합병의 장점을 나팔 부는 여론전을 시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역사가 진정 되풀이된다면 그 이후의 일은 뻔하기 때문이다. 삼성자동차는 IMF 외환위기의 와중에서 그 운명을 다하는 데는 채 5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어떤 사건이 평행이론을 완성할 후보인가. 필자는 가계부채 붕괴를 가장 가능성이 큰 요인으로 지목한다.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는 이미 1000조원을 넘어섰고, 최근에는 다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기업금융과 외국환 업무에 장점을 가지고 있는 외환은행이 그냥 “붕어빵” 은행인 하나은행에 합병될 경우 아마도 그 특징을 상당 부분 상실하고 소매금융 확장에 내몰릴 가능성이 크다. 지난 2년 동안 하나금융이 외환은행을 지배하면서 보인 행태가 그 증거다. 어쩌면 합병 후 제2위 은행으로 등극한 후, 시장점유율 제1위를 달성하고자 더욱 공격적 경영을 펼칠 수도 있다. LG카드가 삼성카드를 추월하고자 무리한 영업을 했던 사례도 있지 않은가. 그러다가 가계부채가 붕괴한다면 약속 파기의 아픈 결과가 직격탄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2017년 1월30일은 외환은행이 설립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합의서가 거론하는 5년은 2017년 2월17일이 되어야 겨우 완성된다.
전성인 | 홍익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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