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세상] 소득 2만달러 시대의 행복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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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세상] 소득 2만달러 시대의 행복 찾기

by eKHonomy 2011. 4. 7.
박경철 | 의사·경제평론가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 행복하지 않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다. 기상이 드높아야 할 청년학생이 절망하고 그들의 부모들이 웃음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거시지표는 숨가쁘게 상승하고 있는데, 대체 왜 그럴까?

일찍이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와 폴 새뮤얼슨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던진 바 있다. 먼저 새뮤얼슨은 행복을 ‘가진 것/욕망’으로 규정했다. 가진 것을 늘리거나 욕망을 줄이는 것이 행복의 척도라는 의미다.

더 가지거나 욕망 줄이거나 양갈래

지극히 통찰적인 결론이다. 실제 인류의 행복 찾기는 이 공식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앵거스 메디슨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인간은 예수 탄생 시점에서 18세기 초입에 이르기까지 1700년간 인류의 생산성 증가는 고작 30% 남짓이었다고 한다.
봉건 영주와 농노, 혹는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는 생산성 향상의 동기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많은 생산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을 때 인간은 혁신을 추구하지 않았고, 생산성은 더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인간은 가진 것을 늘리고 싶어도 수단이 없었다.
기술의 발전에는 한계가 있었고, 자연이 생산성의 절대적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이 가진 것을 늘림으로써 행복해지려는 시도는 애당초 불가능했던 셈이다.

이 시기의 사상과 철학은 욕망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고, 가진 것을 늘릴 수 없다면 차라리 분모인 욕망을 줄임으로써 행복을 얻는 방식을 추구했다. 축의 시대를 관통했던 인의, 무위자연, 무소유 등의 사상이 그것이었을 테고, 금욕적인 세속종교의 발달도 일정부문 그러한 한계에 기반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전후 상황이 역전됐다. 부르주아 혁명과 자본주의의 성립은 이윤획득의 동기를 제공했고, 그 결과 폭발적인 생산성 혁신이 일어난 것이다.
이때부터 행복의 추구는 ‘욕망을 통제하는 것’에서 ‘가진 것을 늘리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진 것을 늘리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확신으로 굳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산업사회의 발전, 특히 미국식 자유시장주의가 권능을 획득해 간 과정이다.





하지만 새뮤얼슨의 행복의 공식이 맞다면 가진 것을 늘린 지금 우리는 그만큼 더 행복해야 하지만 아무도 행복하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한다.
사회적 우울증은 과거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늘어났고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는 히말라야 언덕의 작은 나라 부탄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욕망을 줄이려는 시도가 ‘인간은 욕망하는 동물’이라는 근본적인 한계에 부닥쳤다면 가진 것을 늘렸음에도 여전히 행복하지 못한 모순은 어디에서 한계가 있었을까?

일찍이 이 문제를 간파한 케인스는 “가진 것을 늘리려면 가지려는 욕망이 그보다 더 크게 자라야 한다”고 답했다. 즉 더 가짐으로써 행복하려는 믿음은 정상에 바위를 밀어 올리려는 시지프스의 신화에 불과했던 것이다. 

개인의 성취 적절히 통제 때 충족

결국 해법은 절충, 즉 욕망의 대상을 전환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즉 더 가지려고 노력하되, 일정 수준 이상에서는 그 대상이 개인이 아닌 사회를 향함으로써 욕망을 선량하게 관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케인스가 “내 후세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통찰력 깊은 에세이를 통해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다.

가진 것을 향한 욕망이 개인의 경제적 성취, 소수집단의 부만을 대상으로 삼을 때 욕망은 날카롭고 사악하며 통제 불가능한 존재가 되지만 그 대상이 소외, 전체 등으로 대상화될 때 욕망은 부드럽고 선량한 것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욕망의 상대적 통제와 전환만이 행복의 방정식을 완성하는 유일한 해법이 될 것이다. 개인과 사회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아름다운 수식을 완성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가 대립 중인 복지와 성장이라는 당대의 명제를 두고 어떤 사회적 맥락을 완성해야 하는지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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