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세상] 신소작농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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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세상] 신소작농의 시대

by eKHonomy 2011. 9. 22.
박경철 | 의사·경제평론가


‘우리나라는 백성의 빈부 차이가 너무도 심합니다. 부자는 그 땅이 한량없이 연해 있고 가난한 자는 송곳을 세울 곳도 없습니다.’ 이것은 중종조 명신(名臣) 박수량이 임금에게 간하는 실록의 한 장면이다. 

경제적 토대의 전부였던 토지가 반정에 공을 세운 공신과 사족들의 점유로 속속 넘어가면서 국가재정이 흔들리고 유민이 속출하는 폐해가 심화되자, 일부 개혁적인 신하들이 중국의 균전제를 모방해서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려 시도했던 흔적들인 셈이다. 

아마 이때 조선의 위정자들이 박수량의 충심 어린 조언이나 조광조의 개혁안을 받아들였다면, 50년 후 임진왜란 때 조선 백성의 일부가 왜적에 가담하여 어가를 쫓는 길잡이가 되는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전 로마에서도 이미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카르타고와의 긴 전쟁을 끝내고 제국을 구축한 로마의 귀족들은 논공행상에 따라 국유지의 상당부분을 나눠가진 후, 전쟁에 종군했던 자영농들의 방치된 농토까지 사들이면서 대규모 농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 대토지 농장들은 전리품으로 획득한 노예들을 노동력으로 활용하면서 저비용 대량생산이라는 규모의 경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쓰러진 것은 소규모 자영농이었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곡물 가격은 대토지 농장의 가격 정책에 따라 춤을 추었고, 경쟁에서 밀려난 자영농들은 속속 자신의 토지를 대토지 농장에 내놓고 유민으로 전락하며 로마의 도시빈민으로 떠돌기 시작했다. 

그 결과 무산자는 군인이 될 수 없었던 원칙에 따라 군대가 약화되었고, 이는 강력한 로마제국의 성벽 귀퉁이가 무너지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소위 ‘라티푼디움’ 체제다.

물론 로마에도 사람은 있었다. 기원전 133년에 호민관으로 뽑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형제는 개인이 점유할 수 있는 공유지 면적을 제한하는 법안을 내놓고, 나머지 국유지를 땅이 없는 시민들에게 나누어주려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중종조의 개혁가들처럼 제거되고 만다.


광주지역 중소상인 단체 등이 SSM 입점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DB)



그럼 역사의 수레바퀴가 그 후 수십바퀴 돌아간 2011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지금 대한민국은 신소작농의 시대다. 주변을 돌아보면 구멍가게는 이미 모습을 감춘 지 오래됐다. 이제는 문방구, 빵집, 아이스크림, 도너츠, 심지어 분식집까지 대자본의 그림자가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집단화된 물류 시스템을 갖추고 아르바이트생을 동원하여, 자본력이 없는 영세자영업자들을 몰아내고 있다. 

대형마트나 기업형 슈퍼마켓(SSM)이 몰아낸 것은 슈퍼만이 아니다. 그 안에는 사진관도, 피자집도, 세탁소도, 미장원도 심지어 애견용품과 뻥튀기집까지 들어차 있다. 그 안에 들어가 살아남은 신소작인들은 자신들의 미미한 자본을 보증금으로, 노동력을 입점료로 지불하며 살아가고 있고, 일부 프랜차이즈의 경우 온가족이 나와 하루종일 노력해도 인건비를 회수하기도 벅찬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그나마 이러한 계약조차 맺지 못한 자영업자의 비극은 끝이 없다. 구획정리된 대농원이 곳곳에 저수지를 파서 물길을 장악하면서, 자영농들의 텃밭에는 물이 마르고 논바닥이 쩍쩍 갈라져버렸다. 이 와중에 새 땅을 개간하거나, 척박한 자신의 논에 모종을 심는 일은 점점 절망의 길이 되어가고 있다.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켜주지만, 아무도 고치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지식인들조차 정파나 이념의 프레임에 걸려 관념적이고 정치적인 구호만 외쳐댈 뿐,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인 토대의 개선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림이나, 혹은 로마시대의 귀족들처럼 스스로가 자본의 이해관계에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에게 이것은 삶의 문제다. ‘우리나라는 국민들의 빈부차이가 너무도 심합니다. 대자본의 기회는 한량없이 연해있고, 가난한 자는 송곳을 세울 곳도 없습니다.’ 과연 누가 이렇게 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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